조선의 여성 역사가 다시 말하다/정해은 지음/너머북스 발행ㆍ280쪽ㆍ1만5,500원
"주상의 사랑이 융성하니 어찌 물러나리오마는/벼슬을 그만두고 숲 아래서 정신을 수양하시오/황금이 궤에 가득함이 나의 소원 아니요/새 집과 맑은 시내도 하나의 보배라네."
남편에게 출세나 부를 좇지 말고 자연과 함께 정신 수양을 해 보라고 권하는 시를 바치는 이 호방한 여인, 이름은 송덕봉(1521~78)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부인이었던 그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기죽어 살지 않는 대신, 남편과 벗의 관계를 유지하며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문예에 능했다. 여성으로서 살림을 주관하고 재산을 증식하는 모습, 노비를 단속하고 농사를 경영하는 모습, 한양과 담양을 오가거나 바깥 구경을 하러 외출하는 모습, 자신의 생일에 여자들을 초대해 모임을 여는 모습, 남편과 집안일을 상의하는 모습,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는 모습 등 송씨의 면면이 그의 남편 미암의 일기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교와 성리학의 영향으로 남녀 역할이 엄격하게 구분됐던 조선시대 때의 부부 모습이라고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책은 조선 시대 유명 여성 25명과 그외 무명의 여성들의 삶을 담았다. 어우동, 장녹수, 혜경궁 홍씨, 허난설헌, 황진이를 비롯해 신태영, 신천 강씨, 이숙희, 계월향 등 역사에 묻혀 버린 흥미로운 여성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여성을 통해 조선 시대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어떻게 다르게 읽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해 볼 기회를 제공하고, 조선 시대의 여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스펙트럼을 열고자 했다"고 책을 쓴 배경을 밝혔다.
엄격한 유교 논리에 경직돼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조선 시대의 여성들의 삶의 보폭은 예상외로 꽤나 넓다. 저자는 요부로 치부됐던 어우동이 실상 왕실 일가의 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형이라는 극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조선의 개혁가들이 진위와 상관없이 여성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치부하고 어우동을 그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
또 저자는 남평 조씨(1574~1645)가 쓴 <병자일기(丙子日記)> 를 통해 피란길에 오른 고충, 남편에 대한 염려, 농사와 바깥일에 대한 관심 등을 기록해 당시 전쟁 상황에서 여성의 심리를 세밀하게 전한다. 평양 기생 출신인 계월향도 철저하게 역사에 파묻혔다. 계월향은 1592년 임진왜란 초기 왜장의 목을 베는데 큰 공로를 세웠지만 광복 이후 불온한 인물로 낙인찍혀 더 이상 주목받지 못했다. 병자일기(丙子日記)>
책은 한 인물이 시대나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당대 또는 후대에 어떻게 재해석되고 다르게 변형돼 왔는지를 살펴보겠다는 의미에서 발간됐다. 많은 사람이 사실이라 믿는 역사에는 당대 사회 구성원 사이에 내재된 권력관계가 반영됐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책은 권력관계를 파헤치기보다는 역사 속 인물의 소소한 삶을 보여 주는 데 더 치중했다. 역사가 잊었던 평범한 조선 시대 아낙들의 삶이 저자를 통해 현대에 새롭게 조명된다.
강지원기자 styl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