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주민 100여명과 함께 귀향해보니…김포 아파트 계약 끝나 세간 들고 속속 선착장에"내달 또 포격훈련 한다는데…" 안전대책 걱정도
생굴 열댓 개가 검은콩조림마냥 까맣게 쪼그라들어 접시 바닥에 말라붙어있었다. 87일 전인 지난해 11월 23일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지던 날, 조순애(54)씨가 점심 반찬으로 먹고 남아 싱크대에 놔둔 굴이다.
조씨는 그날 오후 2시30분께 마을에도 포탄이 떨어지자 집을 돌볼 틈도 없이 섬을 탈출했다. 담가둔 설거지거리, 전기장판 위에 널브러진 이불,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 모두 석 달 전 황망히 집을 떠난 그대로다.
섬에 먼저 돌아온 이웃이 돌봐준 덕에 물도 나오고 보일러도 작동됐지만 오래 사람이 살지 않은 집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와 휑한 느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조씨는 "그래도 집에 돌아오니까 좋다"고 웃었다.
뭍으로 떠났던 연평도 주민들이 돌아오고 있다. 북한의 포격 이후 인천의 찜질방에서 지내다 한달 여 뒤인 지난해 12월19일부터는 경기 김포시 양곡지구 아파트에서 생활해 왔는데, 임시거처였던 아파트의 입주계약이 18일에 만료되기 때문이다.
17일 인천항 여객연안터미널에는 오전 9시부터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비닐가방, 상자, 보자기로 싸맨 보따리까지 애 어른 할 것 없이 등에 지고 손에 든 짐이 한 가득했다.
하루 한번 연평도를 들고나는 322석 규모의 고려고속훼리가 오전 11시30분 출발했다. 평소엔 100명 남짓이 탔는데 이날은 주민과 공사업자, 군인 등 236명이나 탔다. 뱃머리에는 산더미 같은 짐이 쌓였다. TV 밥상 전자레인지 빨랫대 등 주민들이 새로 장만한 세간과 컵라면 계란 등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음식, 얼어터진 보일러를 고치기 위한 보일러용 펌프 등이었다.
주민들은 심경은 어지러운 짐처럼 복잡했다. 귀향은 좋지만 복구와 생계대책이 막막하다는 것이다. 섬의 유일한 세탁소인 백조세탁소 사장 김정미(35)씨는 "세탁소 지붕에 포탄이 떨어져 아직도 구멍이 뻥 뚫린 상태"라며 "언제까지 고쳐준다는 기약도 없고 답답해 죽겠다"고 했다. 꽃게잡이를 하는 연평도 토박이 김광춘(48)씨는 "작년 11월말에 걷어 올렸어야 할 꽃게를 하나도 못 건져 손실이 어마어마한데 다음달 초에 또 한미연합훈련을 해 주민들을 대피시킨다고 하니 걱정"이라고 했다.
후유증도 여전했다. 김수자(54)씨는 "밤에 '딱'하는 손톱 깎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고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포격 당일 헬기 소리가 생각나 가슴이 쿵쾅거린다"며 "다음달에 훈련을 하면 또 인천으로 나갈 생각"이라고 했다. 백조세탁소 사장 김씨도 "'안 가면 안되냐' '나는 하루만 더 있다 가겠다' '또 포를 쏘면 어쩌냐'라고 칭얼대는 일곱 살짜리 딸을 겨우 달래서 나왔다"고 했다.
출발한 지 2시간30분에 배가 연평도 선착장에 닿았다. 짐을 내린 주민들은 뿌옇게 먼지가 앉은 채 주차장에 방치됐던 자가용이나 면사무소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시커먼 그을음이 그대로 남아있는 폐허와 비닐로 창문을 겨우 막아 놓은 집들을 보며 "아직 그대로네…"라고 안타까워 했다.
옹진군 연평면사무소에 따르면 16일 117명, 17일 114명 등 포격 이후 섬을 떠났던 800여명 중 581명이 섬으로 돌아왔다. 면사무소 관계자는 "21일 열리는 초중고 합동졸업식 전에는 나머지 주민도 대부분 돌아올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입주계약 만료를 하루 앞둔 이날 연평도 주민들의 임시거처였던 김포시 양곡지구 아파트에는 여전히 짐을 싸지 못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김영애(51)씨는 아파트 2층 창가에 앉아 늘어선 이삿짐 차들을 바라보며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포탄이 터지는 광경을 눈 앞에서 목격한 그는 충격과 공포로 섬을 빠져 나온 이후 3개월간 한번도 섬에 간 적이 없고, 이번에도 돌아갈 생각이 없다.
김씨는 "다시 그런 일이 생길까 두려워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남편은 일단 돌아가야 해 인천에 연고가 없는 김씨는 혼자 여관방이라도 찾아야 할 판이다. 김씨는 "군에서는 '일단 들어가서 못 있겠으면 다시 나오면 된다'고 하는데 너무 무책임하다"며 "나 같은 사람들은 어쩌라는 거냐. 속상하고, 분하다"고 울먹였다.
연평도주민대책위원회는 "한쪽 길만 터 놓고 몰아가는 강제 입도"라며 정부를 원망했다. 전파나 반파된 가옥들이 채 복구가 안됐고, 어업 재개 시점도 불명확한 상황이라 돌아가도 주민들의 생계대책은 정부에서 던져주는 공공근로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재식(49) 위원장은 "심리검사에서 주민 250여명이 고위험군에 속할 정도로 아직 정신적 상처가 커 임시거주지 기한연장을 요청했는데, '예산이 없다, 대안이 없다'는 답 뿐"이라고 했다. 그는 "3월 초 또 연평도에서 포 사격을 한다는데 안전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주민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포=김창훈기자 chkim@hk.co.kr
연평도=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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