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딛는 걸음마다 '순백의 몽환'… 왜 이제야 찾았을까
제주의 한라산은 일찌감치 겨울을 불러들여 품었다가 느지막이 겨울을 떠나 보내는 산이다. 우리 땅 가장 남쪽에 있건만 은하수를 거머쥘 만큼 하늘과 가까운, 제일 높다란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가버릴 겨울에 대한 연민이 생긴걸까. 날이 확 풀어졌다가 다시 한파가 몰아쳐댔을 때 또 추위냐는 투정보다는 아직 겨울이 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떠나는 겨울을 붙잡기 위해 한라산을 찾았다. 그 꼭대기에 있는 찬란한 겨울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 위해서다. 사방의 바다에서 피워 올리는 수증기는 눈구름이 돼 겨우내 한라산을 덥고 있다. 살짝 구름 위로 봉우리가 솟기도 하지만 금세 눈구름이 너울거리며 산자락을 뒤덮는다. 한라산의 눈꽃은 그래서 겨우내 지지 않고, 매일 새로 두툼하게 피어난다. 한라산을 감싼 그 눈구름은 한라산의 빼어난 설경을 신선하게 지켜내는 보호막과 같다.
언제나 완벽한 꿈속 같은 그 백설의 세상 때문에 매년 겨울이 오면 제주 한라산을 그리워했다. 이번 한라산 산행은 영실코스로 잡았다. 버스에서 내려 20여분 찻길을 따라 올라 영실휴게소에 이르렀다. 이제부터 본격 산행이다. 발목에 스패츠를 두르고, 등산화에 아이젠을 걸쳤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하늘은 티끌 없이 파랬다. 휴게소 주인장은 "정말 좋은 날씨에 오른다"며 "복받았다"고 했다. 고대했던 영실기암의 설경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휴게소 지붕에서 깍깍대는 까마귀 소리마저 반갑게 들렸다. 겨우내 쌓인 눈 위로 산길은 높게 다져졌다. 영실소나무숲을 알리는 안내판도 눈 속에 푹 파묻혀 겨우 그 끄트머리만 모습을 드러냈다.
숲을 한자락 돌고 나서 미끄러운 능선길로 올랐다. 경사가 꽤 되는 오르막이다. 숨은 찼지만 넓어지는 시야에 가슴은 더 시원해졌다. 오백나한이 우뚝 선 영실기암이 당찬 모습으로 눈 앞에 섰다. 구름도 제 몸 씻고 쉬어간다는 한라의 신들의 거처 영실의 아름다움에 오르막의 힘겨움을 잊는다.
희끗희끗하게 잔설을 이고 있는 기암 너머 남쪽 자락엔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그 뒤 햇살에 반짝거리는 건 푸른 바다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장쾌한 바다를 볼 수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병풍바위를 돌아들자 이번엔 섬의 서쪽 자락이 펼쳐진다. 봉긋한 봉우리들이 한라의 품 위에서 오밀조밀 솟았다. 오름의 왕국 제주답다.
저 멀리 앞서 일렬로 줄지어 오르는 산행객들. 순백의 카펫 위를 걷는다. 한라의 순례객들이다. 지금 저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대화를 나누며 걷는지 모르겠지만, 멀리 보이는 그 모습은 구도의 걸음이다. 순백의 한라와 순정의 하늘이 만나는 접점에서 그들은 그렇게 엄숙히 걸어 오른다.
두툼한 눈옷을 뒤집어 쓴 구상나무 군락을 벗어나자 드디어 한라의 정상인 백록담의 화구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쌓이질 않는 깎아지른 벼랑은 속살을 그대로 드러냈고, 시커먼 화구벽은 넓디 넓은 설원과 대비돼 더욱 도드라졌다. 갑자기 산 아래에서 구름이 피어올랐다. 눈구름은 순식간에 설원을 덮더니 백록의 분화구마저 가렸다. 갑작스러운 화이트아웃. 희뿌연 안개 속에서 까마귀의 새까만 날갯짓이 한두 번 파닥거렸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짙은 안개는 안개처럼 스윽 사라졌고 다시 시야에 한라의 정점과 푸른 하늘이 들어왔다. 잠깐 꿈 속을 헤맨 듯했다.
몽환의 설경에 취한 걸음을 휘적휘적 잇다 보니 윗세오름 대피소다. 매점에 줄지어 기다린 뒤 구한 컵라면으로 겨울 산행의 수고로움을 달랬다. 뜨끈한 컵라면 하나에 이렇게 행복해질 수가. 허기를 때우고 대피소 밖으로 나섰다. 산행객이 던져주는 군것질거리를 보고 몰려든 까마귀떼가 눈밭을 덮었다. 한라산의 진정한 주인인 양 으스대던 그 모습은 어디 간 걸까. 새우깡 하나에 창공으로 치솟는 그 몸부림이 애처롭다.
지난해 개방된 돈내코 코스로 내려가려던 계획은 통제시간을 넘기는 바람에 무산됐다. 만세동산을 거쳐 어리목코스로 하산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한없이 펼쳐진 고원의 광야 만세동산은 한라산에 소나 말이 방목되던 시절 소가 최고 좋아하는 들판이었다. 테우리(목동ㆍ제주 방언)가 망을 보던 곳이라 해서 '망동산'이라 불렀던 것이 언제부터인지 '만세동산'이란 이름으로 굳어졌다. 만세동산의 풍경은 돈내코 코스의 백록담 남벽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충분히 달래줬다. 이 황홀한 아름다움을 어떻게 감사해야 할 것인가. 구상나무고 철쭉나무고 모든 걸 눈이 덮었고, 그 순백의 아름다움에 눈이 시렸다. 설원은 구름 한 점 없는 짙푸른 하늘 아래에서 제 빛을 찬란히 토해냈다. 순결한 청과 백, 단 두 가지 색깔뿐이다.
춘삼월이면 연분홍 꽃잎을 흐느적거렸을 참꽃의 잔가지들은 가녀린 눈꽃을 피워냈고, 우뚝 선 구상나무들은 진시황 무덤의 토용처럼 두툼한 눈의 갑옷을 입고 도열했다. 한라의 겨울이 펼쳐낸 마법과 같은 세상이다.
이 황홀한 설경이 있는 한라를 왜 겨울이 다 가서야 올랐을까 후회가 밀려온다. 제주를 찾은 일행들에게 함께 오르자 권했건만, 그들은 하루를 몽땅 쏟아야 하는 산행이 부담스럽다며 발을 뺐다. 멀찍이서도 눈 덮인 한라산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고 했던 그들 생각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에서 정림사탑의 미학을 이야기하며 '백고가 불여일부'란 말을 가져다 붙였다. '고고춤 백번보다 부르스(블루스) 한 번이 더 낫다'는 얘기인데 이곳에도 적용될 듯하다. 감히 말하건대 한라산 언저리를 100바퀴 도는 것보단 한라산을 한 번 오르는 것이 낫다. 겨울 한라는 분명 그렇다. 그 눈부신 설경이 한라의 가는 겨울을 안타깝게 붙들고 있다.
제주=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중문의 새 명소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제주 중문관광단지 한복판에 새로운 명소가 탄생했다. 지난해 12월 개관한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이다. 탐험가 로버트 리플리를 중심으로 설립된 세계적인 박물관 체인으로 국내엔 처음 들어섰다. 미국 영국 캐나다 멕시코 등 11개 나라에 32곳이 있다.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제주는 외형부터 특이하다. 친환경 재료를 사용한 외벽은 만화영화에 나올 법한 로봇을 떠올리게 한다. 내부는 조각공원, 제멋대로 보물창고, 거인의 비밀정원 등 12개 주제의 방들로 꾸며졌다. 전시물에 담긴 스토리와 역사적인 배경에 따라 분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세계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꾸몄다.
전시물은 600여 점. 독일 통일때 무너진 실제의 베를린 장벽, 10억원을 호가한다는 화성에서 날아온 손톱만한 운석, 나사 우주비행사들이 달탐사선에서 입었던 우주복, 죄수 처형할 때 사용했던 전기 사형대, 유니콘 뿔을 가진 남자, 수천 개의 못으로 만든 실제 크기의 누(아프리카의 물소), 오싹오싹한 중세 지하감옥 등 세상의 기묘하고 진귀한 물건들이 전시됐다. 입장료 성인 7,000원, 청소년 6,000원, 어린이 5,000원.
제주=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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