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1995년 치과의사 모녀 살해' 수사 윤건영 前경감이 본 '의사부인 사망사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1995년 치과의사 모녀 살해' 수사 윤건영 前경감이 본 '의사부인 사망사건'

입력
2011.02.17 00:13
0 0

1995년 6월 12일 오전,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을 끈 소방대원은 욕실에서 30대 여 치과의사와 한 살배기 아이의 시신을 발견했다. 지금까지도 대표적 미제 사건으로 기억되는 '불광동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의 시작이었다.

당시 범인으로 지목된 이는 여의사의 남편이었던 외과의사 B씨였다. 경찰은 살해 동기 등 수많은 정황 증거를 내밀었다. 부검 결과 등 과학적인 증거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법정 공방은 8년 간이나 이어졌고, 대법원은 2003년 2월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사건의 대법원 판결로부터 다시 8년이 흐른 지난달 14일.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 욕실에서 만삭의 의사 부인이 주검으로 발견됐다. 이번에도 남편이 범인으로 지목됐다. 남편은 사고사라며 완강히 혐의를 부인했고 법원도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사람들은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을 떠올렸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 마포경찰서 인근에서 전 서울 은평경찰서 강력계장 윤건영(70) 경감을 만났다. 그는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그는 1999년 명예퇴직하고 두문불출하고 있는 터라 열흘 넘게 수소문한 뒤에야 연락이 닿았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만삭의 의사 부인 사망사건의 남편 A(32)씨가 피의자 신분으로 다시 경찰에 소환된 날이다.

윤 전 경감은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느냐"며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16년 전 사건에 대해 관련 인물들의 이름은 물론 각종 날짜까지 모두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속이 쓰리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건도) 쉽지 않겠다"고 자신의 일처럼 걱정했다.

그는 이번 사건의 관건은 "직접적인 증거의 유무"라고 압축했다. 숨진 박모(29)씨의 몸에 난 상처, 손톱에서 발견된 남편의 DNA 등 부부싸움의 증거와 박씨 목의 내부출혈 등 목이 졸린 흔적을 적시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를 확보한 경찰은 "99.9% 남편이 범인"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군 입대와 집 처분 문제 등으로 다투던 중 A씨가 우발적으로 부인을 목 졸라 살해했다는 경찰의 판단을 그에게 들려줬다.

윤 전 경감은 그러나 "부족하다"고 말했다. "부부싸움의 증거는 되겠지만 살해했다는 직접 증거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는 "1995년 사건 수사는 지금보다 훨씬 완벽했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시반(屍斑ㆍ시신에 나타나는 얼룩)과 시신의 강직 상태, 피해자의 소화 상태 등을 분석한 국과수 감정, 시뮬레이션에 의한 화재 발생 시각 추정, 거짓말탐지기 반응 결과 등으로 "남편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100% 증명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담당 검사가 '경찰이 이렇게 철저하게 해준 건 처음'이라고 감탄하고, 사형을 선고한 1심 재판부도 '피고인(남편)은 지금이라도 양심에 사죄하라'고 다그칠 정도였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간접 증거와 정황에 불과할 뿐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라는 게 법원의 최종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윤 전 경감은 이 말 끝에 고등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된 이후 자신들이 피땀 흘려 모은 증거가 결국 쓸모 없는 것이 됐다는 자괴감에 사표를 낸 부하 직원을 떠올렸다.

20년 동안 강력범죄 수사 전문가로 일했던 그는 이번 사건을 되짚어볼 것을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 당시 남편을 구속시키는 데만 4개월이 걸렸어요. 정 안되면 재부검이라도 해야 합니다." 사건 발생 20일도 되지 않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가 기각 당한 이번 사건 수사팀의 성급함에 대한 지적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얘기가 수사팀에 부담이 될까봐 걱정도 하는 눈치였다. "단지 과거의 경험일 뿐"이라고 그는 수 차례 언급했다.

그의 마지막 언급은 미제로 남은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에 대한 아쉬움과 후배들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였다. "여전히 저는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의) 범인이 남편이라고 봅니다. 다만 법이 아니라고 했을 뿐이죠. 수사가 어렵다는 건 알지만 법이 요구하는 증거를 확보해서 나 같은 안타까움을 지금 수사팀이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서울 마포경찰서는 21일께 A씨에 대해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재신청할 예정이다.

남상욱 기자 thot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