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경기 고양시의 한 멀티플렉스에선 12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겉보기는 여느 주말 극장가와 다를 바 없었으나 몇몇 상영작들이 관객들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했다. ‘127시간’ ‘아이들’ ‘그대를 사랑합니다’ ‘만추’ 등 17일 개봉 예정인 5편의 영화가 기존 개봉작들과 섞여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16일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지난 주말 ‘아이들’은 전국 232개 스크린에서 7만9,674명을, ‘127시간’은 140개 스크린에서 1만9,157명을 모았다. ‘그대를 사랑합니다’(1만3,480명)도 147개 스크린에서 상영됐다. ‘아이들’과 ‘127시간’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지난 주말 박스오피스 순위 8~10위를 나란히 차지했다. 세 편 모두 개봉을 하지도 않고 개봉과 다름 없는 상황을 누린 셈이다. 이들 영화 상영은 개봉이 아닌 유료 시사회 형식으로 이뤄졌다.
유료 시사회 등을 빙자한 변칙 개봉이 늘면서 관객들의 혼선을 야기하고 있다. 극장가의 유통질서를 어지럽힌다는 비판도 고개를 들고 있다.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들의 대거 상영은 규제 없는 시장논리에서 비롯됐다. 극장들은 설 연휴를 보낸 뒤 이렇다 할 대형 신작들이 없자 다음 주 기대작들을 미리 당겨 상영하고 있다. 기존 영화로는 호객행위를 하기 쉽지 않으니 따끈따끈한 ‘신상품’으로 관객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 개봉 전 상영을 통해 시장을 선점하고, 영화를 더 알리려는 배급사들의 의도가 극장들의 필요와 맞물리면서 개봉 전 상영이 늘고 있다. 한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의 관계자는 “2월은 전통적인 비수기라 극장들이 관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고심하기 마련”이라며 “개봉 예정작의 앞선 상영은 비즈니스 논리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밝혔다.
디지털 상영의 증가도 개봉 전 상영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디지털 상영에 따라 배급사들은 특정 영화를 필름보다 더 빨리 배급하게 됐고, 극장들도 쉽게 상영할 수 있게 됐다.
관객들은 보고 싶은 신작을 일찌감치 접하고, 극장은 이익을 챙기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식 상황 같지만 만만치 않은 부작용이 예상된다. 개봉 예정작들에게 미리 자리를 내주면서 완성도는 높으나 대중성은 떨어지는 기존 상영작들의 설 자리가 좁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계의 한 관계자는 “한국영화는 DVD 등 부가판권 시장이 붕괴된 상황이라 극장 수입에 더 매달릴 수밖에 없다”며 “스타 배우가 출연하지 않는 수작들에게 부담을 더 줄 수도 있다”고 비판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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