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향으로 앉은 따스한 마을이어서 눈이 귀한 은현리에 속수무책으로 폭설이 쏟아졌다. 처음엔 서정으로 시작한 눈이었지만 마당에 찍히는 발자국이 깊어지자 문득문득 두려워지기도 했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따뜻한 남쪽엔 눈은 귀한 하늘의 선물이다. 귀한 선물이다 보니 나는 서정 시인을 자처하면서도 눈에 대해 제대로 된 시 한 편 쓰지 못했다.
내게 눈은 나그네 같은 것이었다. 자는 사이 잠시잠깐 다녀가는 꿈이었다. 땅에 닿자마자 사라지는 추억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종일 눈이 내렸다. 하늘을 스크린 삼아 눈이 연출하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였다. 그러다 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큰길로 나가는 마을길이, 산으로 가는 고갯길이 사라졌다.
내게로 오는 길이 사라졌다. 그러다 깨달았다.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내가 보인다는 것을. 그날 울산의 적설량은 21.4cm. 1937년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최고의 눈이었다. 그동안 최고를 자랑하던 12.7cm의 기록의 두 배에 가까운 적설량이었다. 예전엔 2월의 눈을 서설(瑞雪)이라 부르며 반겼는데 이 번 눈은 눈 폭탄이란 원망을 들어야 했다.
처음 맞는 대설로 도시는 북새통이 되어버렸지만 시골 은현리는 조용한 눈 속의 섬이 되었다. 우편배달부도 오지 않는 적막에 갇혀 나는 오랜 만에 종일 행복한 묵언을 즐기며 폭설을 맞았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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