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지평선] 세시봉의 부활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지평선] 세시봉의 부활

입력
2011.02.15 12:08
0 0

어디 무교동의 뿐이랴. 1970년대 초ㆍ중반 명동을 중심으로 한 불과 반경 2km 안 서울 도심에선 대중문화가 용광로처럼 끓었다. 대충 기억하기에 명동의 , 소공동의 , 퇴계로ㆍ충무로의 등이 대표적인 무대였던 것 같다. 여기서 저녁마다 포크가수들의 정감있는, 혹은 의미심장한 노래와 함께 각기 록 솔 사이키델릭을 표방하는 밴드들의 음악이 흘러 넘쳤다. 중국대사관 앞의 이른바 '딸라골목' 어두운 카페에선 헤비메탈 음반의 소음이 귀청을 찢었다.

■ 가히 다양성의 폭발이었다. 기억하건대 그 이전, 그 이후 어느 시대도 우리 대중음악에서 이토록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또 장르마다 거의 공평하게 공존했던 때는 없었다. 한쪽에서 여전히 남진 나훈아 배호의 트로트도 굳건한 영역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테이블 바로 코 앞 낮은 무대에서 송창식 이장희가 노래를 불렀고, 노래가 끝나면 이 당대의 톱스타들이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내려와 대학생 손님들과 친구처럼 어울렸다. 음악의 생산과 소비가 칼로 자르듯 구분되지 않았다. 시대의 문화를 함께 만들고 모두가 향유하는 분위기였다.

■ 으로 통칭되는 70년대 음악이 돌연 부활했다. 아니, 부활 정도가 아니라 사회현상으로 볼 수준이다. 쉽고 정감 있으되 경박하지 않은 음악적 품격의 재발견, 그에 대한 열광이다. 개인적으로 당시 음악에서 가장 높이 사는 건 가사의 함축적 의미와 시적 아름다움이다. 70년대 음악실험을 처음 시도한 한대수의 등에서의 절절한 의식, 김민기의 '어느 초라한 길목엔 버려진 달빛 고였나…'() 등의 기막힌 언어들을 보라. 이런 노래들로 호흡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숨막힌 시대를 온전히 살아냈을까.

■ 이 중ㆍ장년을 넘어 젊은이들의 감수성까지 건드렸다는 건 의미가 크다. 지금 대중음악의 압도적 주류는 어려서부터 학원 교습식으로 훈련 받은 아이들이 누가 하든 별 차이 없을 어슷비슷하고 반복적인 춤과 노래를 받아 무대에서 다만 재현해내는 형식이다. 재능이 아무리 뛰어난들 대중예술인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방식에 충실한 가무(歌舞)기술자들에 가깝다. 그 기계적 생산물에 마음 깊숙한 곳까지 감동 받을 턱은 없다. 을 일시적 복고풍조가 아닌, 우리 대중문화 전반의 위기징표로 봐야 하는 이유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