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미국 나들이는 1968년 하와이 대학에서 주관한 학술모임에 불려 간 것이 처음이었다. 난생 처음의 해외 나들이라, 그것 자체로도 감명 깊었지만, 한국 문화를 일본과 중국의 것에 견주어서 그 개성을 말하게 된 것이 여간 뜻 깊은 게 아니었다.
그 2 년 뒤, '객원 교수'라는 명분으로 하버드 대학에 간 것이 두 번째였다.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세 나라의 문화에 중점을 둔 '하버드-영경 연구소'(Harvard-Yenchin Institute)에 소속되어서 꼬박 한 해를 캠브리지에서 보내었다.
청강생으로 강의도 들으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고 했다. 틈틈이 캠브리지 시내는 물론이고 보스턴까지 나다니면서 박물관이며 미술관도 단골로 찾아 다니고 했다. 그 무렵 우리나라에는 그런 시설이 단 한 곳도 없었기에 굶주린 문화적 욕구를 게걸스럽게 채우기 바빴다.
보스턴 미술관에서 윌리엄 터너의 '난파선'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폭풍에 휘말린 바다 마냥 요동쳤다. 고갱의 '우리는 누구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냐'앞에서는 그 작품이 내걸고 있는 물음을 내게 던지기도 했다.
앤드류 와이어스의 그 유명한 헬가의 누드화를 보면서 사실주의에 얹힌, 여인의 알몸의 신비에 깊이 젖어 들기도 했다. 그건 숙연하고 경건하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보스턴 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의 회원이 된 것이 가장 신나는 일이었다. 그다지 많지 않던 봉급을 서슴없이 털어서 연차(年次) 회원권을 사게 된 것이 여간 뿌듯하지 않았다. 그 당시 국내에서 외국 교향악단의 생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가망도 없었기에 격주로 정해 놓고 감상하는 정기 연주는 나의 '신천지'였다.
한데 그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마침 친구가 워싱턴에서 찾아 왔었는데, 굳이 보스턴 교향악단의 연주를 듣고 싶다고 했다. 일 년치의 회원권을 갖지 않고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일 날 입장권을 따로 구한다는 것은 거의 가망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기회원이 나오지 못해서 빈자리, 꼭 그 수만큼 임시로 입장시켰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그를 데리고 심포니 홀로 갔다. 그것은 공교롭게 나의 회원권에 맞춘 금요일이었다. 그의 표만 구하면 둘이서 함께 들어 갈 수가 있었다. 홀의 정문에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계단 위에서 입장권을 흔들어대고 있는 게 용케 눈에 들었다. "티켓이 필요한 사람!"하고 소리치고 있는 그 미국인 청년에게로 바싹 다가가서는 손을 내밀었다. 날름 표를 건네주는 그에게 내가 물었다.
"값은?"
"그냥 드리는 거요."
그 대답을 의심쩍어하는 나에게 타 이르듯이 그가 말했다.
"오늘 밤에 바쁜 일이 생겼지 뭐요. 그러나 표를 그냥 버릴 수는 없었소. 내 아파트가 이 근처라서 가지고 나온 것뿐이오."
"그래도 그냥은?"
"아니요. 이 표가 제 구실하게 해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오."
활달하게 말하고는 그는 걸음을 재촉하다 말고 돌아보면서 "오늘밤, 음악 즐기시라고요"라고 했다. 소리치는 그를 향해서 나는 높이 든 손으로 표를 흔들어 보였다. 표를 묵히기 아깝다고 해서는 남들에게 주되, 그나마 일부러 현장까지 나와서는 돈도 안 받고 주다니!
공짜 표를 얻은 나로서는 그게 음악에 대한 사랑이며 열정 탓일 거라고 생각하니, 사뭇 가슴이 찡했다. 그날 밤의 연주는 그래서도 더한층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한데 심포니 홀은 또 다른 감동을 내게 선물했다. 그것도 정말이지 뜻밖의 감동을 안겨주었다. 값이 싼 회원권이었기 때문에, 홀 안에서 나의 정해진 자리는 초라했다. 이층의 왼쪽 구석이어서 교향악단의 전모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 바른 편 옆자리는 웬 중년의 미국인 남성이 차지하고 앉았었다. 두어 차례의 연주를 감상하면서 그저 어정쩡하게 남남으로 지났다. 그게 쑥스러웠던지, 어느 날 연주의 전반부가 끝나고 잠깐 쉬는 틈에 그가 말을 건네 왔다. 자기를 신부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걸 받아서는 한국에서 혼자 와서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교수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아, 그래서였군요. 으레 남녀가 쌍쌍으로 오기 마련인데, 내가 그렇듯이 당신도 늘 혼자서 오는 곡절을 인제야 알게 되었네요."
그 뒤, 연주회 때마다 우리 독신의 사내들은 음악을 화제 삼아서 제법 대화를 주고받았다. 기한이 차서 귀국길에 유럽으로 갈 때, 노르웨이에 들릴 계획이라고 하는 나를 위해서 오슬로에 살고 있는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신부는 말했다. 그만큼 어느새 서로 터놓고 지나게 된 셈이었다.
한데 최종 연주회에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보지도 못한 채, 나는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섭섭했지만 도리가 없駭?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이내 나는 뜻밖에 그의 편지를 받았다.
'마지막 연주회에는 급한 일로 가질 못했소. 당신을 못 본 게 섭섭해서 하버드대학으로 찾아가서, 언젠가 당신이 들먹인 '하버드-연경 학회'에서 당신이 소속된 한국의 대학의 주소를 찾았소. 그래서 편지를 띄우니 연락주기 바라오.'
편지에 동봉된 다음 해의 보스턴 교향악단의 연주 목차가 적힌 팸플릿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맞추었다. 서로 옆 자리에 앉은 것뿐인 그 별것도 아닌 인연을 소중하게 다듬어준 이국인의 정이 가슴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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