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악착같이 일을 하며 특종도 적지 않게 하곤 했으나 사진을 인정 받아 상을 탄 것은 주로 세계일보에 재직할 때였다. 신문사에 다니던 초창기 해외 국제사진전에 출품해 수상을 한 적은 있으나 이후 국내 사진전에는 출품 자체를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3년 세계일보 기획시리즈 '대(大) 한국인 안중근'으로 그 해 한국기자상을 수상하고 1995년에는 국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또한 1990년에 시작해3년 여 동안 신문에 연재한 '재인(才人)'을 정리하여 '전통 예인 백 사람'을 출간해 문화부 이규원기자와 함께 27회 한국기자상 출판제작부문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당시 나는 박정진 문화부차장과 자주 자리를 같이했는데 스무 살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며 서로의 생각에 공감했다. 박차장은 젊은 나이에도 문화와 국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어느 날 전라도 일대의 무당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판소리와 기악으로 커졌고, 춤과 굿판에 관심을 가지고 평생 기록을 해왔던 나와 의기 투합해 '재인'이라는 타이틀로 전국의 무속 예술인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문화부 이규원기자가 르포를 쓰고 나는 시리즈의 기획과 진행, 그리고 사진을 맡았다. 무당 또는 광대라 일컬어졌던 소위 세습 예술인들의 인생담과 가계 혈통을 취재해 기사와 사진으로 실으면서 많은 고초도 겪었고 시리즈를 진행하며 여러 명의 광대들이 작고하기도 해 안타까운 점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보람 있는 작업이었다.
내가 예인(藝人)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51년 전쟁의 와중에 처음 사랑의 감정을 느낀 향순이와의 관계에서 시작됐다. 6ㆍ25 후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군대와 경찰로 구성된 지리산 전투사령부에서 작전을 전개할 때마다 사진을 찍어 전과를 기록하는 문관을 맡고 있을 때 향순이를 알게 됐다.
남원에서 이름난 남선관 요리 집에서 기생으로 일하던 향순이의 부탁을 들어준 후 전북 순창이 고향이던 그녀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 집이 대대로 내려오는 당골 무당 집안이었다. 하루 밤을 자고 났더니 대낮에 마을에 굿판이 벌어졌다. 구경을 하는데 피리, 장구, 징은 물론이고 삼재비(피리, 장구, 저 부는 사람을 통칭)까지 등장하는 대형 굿판이 마냥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이때부터 굿에 대한 흥미를 가져 이곳 저곳 굿판과 소리판을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기록을 시작하게 됐다. 향순이와의 짧은 사랑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와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며 끝이 났지만 국악에 대한 나의 관심은 오히려 높아져 갔다. 일간스포츠에 재직하던 1982년 구희서기자와 한국의 대표적 춤꾼 120명을 취재 해 '한국의 명무(名舞)'를 기록했다. 그 동안의 경험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당시 조두흠 편집국장에게 제안을 해 이뤄진 것이다.
오래 전, 남원이나 광주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찾아 나서니 이름이 꽤 유명해진 사람도 있었지만 세상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도 많았다. 승무(僧舞)로 유명한 조앵무는 담양에서 살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외딴 마을에서 그를 찾았는데 걸음새 자체가 이미 춤이었다. 신분을 밝히고 춤을 한번 청하니 "장단도 없이 무슨 춤이라뇨?" 하면서도 몸이 벌써 들썩거린다. 민살풀이 춤으로 알려진 군산의 장금도도 마찬가지다. 장씨는 살기가 싫어서 그가 죽었다고 소문을 낼 정도였다. 죽었다는 장금도를 목욕탕에서 찾아내 춤을 추게 했더니 손 올라가는 장단이 벌써 춤사위에 흠뻑 젖어 있다.
장금도와 함께 빠질 수 없는 이름 하나가 남원의 조갑녀다. 수건을 들지 않고 추는 민살풀이 춤에 이 두 여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국의 명무' 에는 조갑녀가 아닌 조갑례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녀가 자손에게 화를 입힐까 봐 실명을 밝히기를 극구 사양했기 때문이다. 조씨는 남원에서 여관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나를 맞았다.
"조갑녀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집사람은 잠시 출타 중인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보물을 찾으려고요." "보물이라뇨? 저는 그런 게 없습니다." "부인 춤을 보러 왔습니다." "아니, 우리 아내가 춤을 추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조갑녀도 춤추는 게 세상에 알려지는 걸 싫어했다. 조씨가 집에 돌아와 춤을 추게 하는데 하루 종일이 걸렸다. "춤은 무슨 춤… 내가 춤을 놓은 게 몇 년 째인데..." 내 청에 못 이겨 결국 남원 국악원에서 춤을 추는데 노련한 재단사가 옷감을 만지듯 손동작 하나하나가 호흡과 일치되고 있었다.
이 외에도 전국을 돌며 숱한 춤 꾼과 국악인들을 만나 그들의 춤사위가 내 카메라에 기록됐다. 세계일보로 옮겨 '재인'까지 기록하며 나름대로 전통 예능에 누구 못지 않은 안목을 가지게 됐다. 명무와 재인을 기록하며 나도 절반 정도는 재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춤 동작 하나만 봐도 세습한 춤인지 아닌 지를 금방 구별할 수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피는 못 속인다고, 세습무 출신들은 소리와 몸놀림, 놀음새가 벌써 남들과 다르다. 춤 꾼과 재인들 가운데는 세상의 멸시로 인해 자신의 출신 신분을 감추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대외적으로도 인정받으며 생활까지 유지하는 시대가 됐다. 소중한 무형 문화 유산을 지닌 그들이 더욱 인정을 받고 내내 건강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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