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니 무바라크의 이집트 정권이 극적으로 막을 내리면서 미국의 대 중동정책도 일대 전환이 불가피해졌다.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최초의 아랍국가인 이집트를 30년 동안 철권통치하며 미국의 ‘중동 교두보’ 역할을 수행한 무바라크의 퇴장은 미국의 기존 중동정책이 용도 폐기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미국은 중동정책은 ‘지정학적 이익’과 ‘민주주의’라는 두 가치를 적절히 조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지정학적 이익을 위한 중동의 안정을 우선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중동의 여성과 인권, 언론상황을 비판하긴 했지만 대 테러, 이스라엘 안보, 석유자원 등 국익을 뒤흔들 수 있는 화급한 사안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역대 미 행정부가 이집트의 민주화를 촉구하면서도 독재자 무바라크 정권에 연 15억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군사원조를 한 이율배반적 행동을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더 이상 국익을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유보할 수 없게 됐다. 이집트 혁명은 미국이 민주주의를 거부할 경우 국익은 물론 ‘민주주의 수호’라는 가치도 모두 상실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무바라크의 퇴진을 놓고 백악관과 국무부가 충돌한 것은 ‘다음 세대의 외교 가치’(뉴욕타임스)를 위한 진통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중동의 민주주의를 추구하면서 미국의 기존 이익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데 딜레마가 있다. 차기 정부 구성에 다양한 정파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반영되야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협정 철폐를 요구하는 무슬림형제단과 같은 반미성향의 이슬람 세력이 부상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악몽이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는 “지역 평화와 안정을 기반으로 하는 지정학적 이익과 민주주의가 배치되지 않는 새로운 외교정책을 구상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이집트 정권 붕괴로 불안감을 느끼는 친미 중동국가를 어떻게 감싸안을 것인가도 숙제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쿠웨이트 등 친미국가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무바라크 즉시 퇴진을 압박하자 민주화 시위가 자신들에까지 파급될 것을 우려, 미국에 강한 불쾌감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한시적으로 무바라크 권좌를 용인하는 방안을 제시한 데는 이들 국가들의 입김도 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중동의 미 동맹국들이 무바라크의 퇴진을 보고 미국과의 친분도 권좌 유지에 충분치 않다는 점에 놀랐을 수 있다”며 “미국이 무바라크 편을 들지 않은 것에 분노해 대미 관계를 후퇴시킬 수 있다”고 전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요르단 국왕, 터키 총리와 전화통화를 통해 중동정세를 논의한 것이나, 마이크 멀린 합참의장과 윌리엄 번스 국무차관이 중동지역 급거 순방에 나선 것은 미국의 변함없는 지원을 다짐하기 위한 차원으로 볼 수 있다.
워싱턴=황유석특파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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