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세계에도 면면히 흐르는 맥(脈)이 있다. 시의 독창성이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아니라 여러 뿌리에서 돋아난 꽃이란 얘기다. 한 시인에 스며들어 거름이 된 또 다른 시인은 누구일까.
계간지 시인세계가 2011년 봄호 특집으로 '내 시 속에 또 다른 시인이 걸어 들어왔다'는 제목으로 그 궁금증을 풀었다. 16명의 시인들이 자신의 시작(詩作) 과정에 영향을 미친 선배 시인들에 대한 내밀한 얘기를 들려준다.
많이 언급된 선배 시인들은 이상 김수영. 김영승(53)씨는 고교 시절 이상의 '자조와 허무의 삶의 태도'와 김수영의 '고통과 모욕에 대한 자의식'에 경도된 경험을 들려준다. 그의 시 '오이'는 김수영의 '풀'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석ㆍ박사 논문을 이상에 대해 쓴 김승희(59)씨의 '유목을 위하여 1'에 등장하는 '토끼'는 이상의 '오감도'에 등장하는 '아해'의 변주다. 이수명(46)씨도 어느 새벽에 이상의 시 '절벽'을 우연히 펼치는 순간 전율했던 경험을 고백한다.
최영철(55)씨는 '자신의 소시민성을 만천하에 내팽개치는 용기'를 보여 준 김수영에게서 혁명보다 더 큰 충격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를 통해 일상이라는 누추하고 답답한 감옥이 '준엄한 자기 응시'를 통해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 그의 시 '오체투지'는 그런 발견의 순간을 담은 시다.
장석주(56)씨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힌 적 있는 백석을 들었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삶의 깊은 데로 꿰어 보고 나오는 그 내성의 목소리에 흠뻑 빠졌다는 고백이다. 그의 시 '태양초'는 백석에 대한 오마주라고 말한다. 군대 시절 김현승의 시에 흠뻑 빠져 있었다는 정호승(61)씨는 그를 통해 혼탁한 세계 속에서도 시인의 순결한 정신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꿀벌'엔 김현승 시의 내음이 커피향처럼 진하게 배어 나온다. 손택수(41)씨는 자신의 시 '수채'가 장석남의 '수묵정원 9'에서 발상을 얻었음을, 송재학(56)씨는 조선 시대 윤춘년의 글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얘기한다.
시적 친연성 속에서 문인끼리의 친교 관계도 읽을 수 있는데 서정주의 애제자였던 문정희(64)씨는 시 '그의 마지막 침대'에서 선생이 돌아가시기 직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김종해(70)씨는 '저녁밥상'에서 목월과 함께 했던 친밀한 시간을 보여 준다. 강은교(66)씨와 이가림(68)씨는 외국문학 전공자답게 각각 엘리엇과 이브 본느푸아를 시적 혈연관계로 꼽았다. 문학평론가 이혜원씨는 시인들의 관계를 정신과 태도, 발상이나 언어, 직접적 친교로 구분한 뒤 "시인의 위치는 선대 혹은 후대 시인들과의 관계의 좌표 속에서 정해진다"며 "시의 인생은 누군가의 시를 읽는 데서 시작돼 누군가의 시에 녹아 들면서 이어진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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