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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25에만 기억하는 에티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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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6·25에만 기억하는 에티오피아

입력
2011.02.10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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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든을 넘긴 이디오피아 참전용사 한 분이 창문 없는 좁은 움막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경추부 골절로 목에 기브스를 한 노인은 워낙 노쇠해 수술도 할 수 없는 처지여서 진통제로 통증을 달래는 형편이라고 한다. 60년 전 6ㆍ25 전쟁에 참전했을 때 강건했을 노인의 몸은 앙상하게 야윈 상태였다. 손을 잡아드렸지만 내 손을 쥐고 있지도 못하셨다.

그러나 노인은 한국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난했던 한국이 이제는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는데, 달라진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게 평생에 제일 큰 한이라고 하셨다.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죄송하다고 말했더니, "한국에서 온 사람을 직접 봤으니 이제 됐다"고 하셨다.

대통령 서명이 들어간 시계를 채워드렸다. "우리 국민 모두가 어르신의 희생에 깊이 감사 드린다"고 말씀 드렸다. 어르신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작별인사를 하던 부인은 나를 와락 껴안고 흐느꼈다. 그 방에 있던 우리 모두 함께 울었다.

이디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는 '한국 마을'이 있다. 참전용사들이 귀국하자 왕은 넓은 땅을 하사해 마을을 이뤄 모여 살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1974년 왕정이 전복되고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이들은 국왕의 친위부대였다는 이유로 소외되어 극빈층으로 전락했다. 3,000명을 넘던 참전용사들도 뿔뿔이 흩어져 이제는 마을에 사는 1,200세대 중에서 참전용사 가정은 200세대에 불과했다. 빈자리는 다른 극빈층 가정이 메웠다.

이곳에선 일 할 수 있는 가장들은 대부분 일용직 노동을 한다. 하루 5,000원 정도 일당을 받는다. 은퇴하면 한 달에 4,000원 연금이 나온다. 마을 초등학교는 공립이라 등록금이 없지만, 생활이 너무 어려워 대체로 두 명 중 한 명은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국제구호개발 NGO 월드 투게더가 지원하는 두 군데 초등학교의 점심 급식은 이곳의 많은 아이들이 하루에 유일하게 먹는 끼니이다. 2,3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모두 먹일 수가 없어서 월 소득 3만원이 안 되는 가정의 아이들만 먹인다. 그래서 방학 중에도 급식을 중단할 수가 없다.

그 동안 한국에서는 수많은 자선단체 NGO 지자체 정부기관이 참전용사를 찾았다. 이들은 더러 장밋빛 약속으로 주민들을 설레게 했으나, 사진 찍고 돌아가서는 소식이 없는 곳이 많다고 한다. 교민들은 더 큰 상처를 주었다고 씁쓸해 했다.

지난해 전쟁 6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행사를 했다. 어느 정도 살 수 있는 나라라면 기념일을 챙기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형편이 그렇지 못한 곳에는 꾸준한 배려가 따르지 않으면 상처가 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전쟁 60주년을 기념하며 이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이 우리를 위해 바친 고귀한 희생을 상기시켰다. 그렇게 잡은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기념일에만 이들을 기억하고 잊는 것은 무책임하다.

벼룩이 옮으니 악수 정도만 하는 게 좋겠다는 충고를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새하얀 전통의상을 입고 서 있는 천사 같은 여자아이들, 아리랑을 종알종알 따라 부르는 아이들을 껴안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내 눈으로 직접 이들을 본 이상, 앞으로 나는 평생 이들을 외면하고 살 수 없을 것이다.

조윤선 대외원조홍보대사·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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