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사랑하는 청년이 있다. 틈만 나면 산과 들로 달려가 호연지기를 기른다. 자전거를 타다 굴러 얼굴에 생채기가 나도 고통스러운 신음대신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다. 그것마저 자연이 줄 수 있는 선물이라는 것처럼. 그런데 이 청년, 협곡을 찾았다가 바위 사이에 한쪽 손이 끼면서 옴짝달싹 못하게 된다. 아무리 도와달라 외쳐도 그 누구도 손 내밀 수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 수중에는 로프와 칼, 전등, 캠코더, 물 500㎖가 있을 뿐.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 고독을 이겨내기엔 별반 도움이 안 돼 보인다. 생환의 가능성을 찾기 힘든 상황인데 결국 청년은 127시간의 외로운 사투 끝에 사지를 탈출한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게다가 실화다. 영화 제작자와 감독이라면 무릇 탐을 내고, 군침을 흘릴 만하다. 그러나 속내를 살피면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상영시간 대부분을 한 곳에 머물면서 한 인물의 고통스러운 5일을 전해야 한다. 마라톤 중계보다 지루할 수 있는 내용. 흥미롭다며 섣불리 덤볐다가 본전도 못 찾을, 계륵 같은 이야기다. 약삭빠른 감독들이라면 일찌감치 손사래를 칠 테고, 재미에 민감한 관객들은 눈길을 쉬 주지 않을 듯하다. 실화의 주인공이 극영화 제작을 한사코 반대하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주장했던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일 듯하다.
줄거리만 그럴 듯하고 정작 볼 내용을 없을 듯한데 영화 '127시간'은 재미있다. 마라톤이 아닌 일진일퇴의 박진감 넘치는 축구를 보는 듯하다. 빼어난 연출력과 연기에 공을 돌릴 수 밖에 없는 영화다.
아니나다를까. 대니 보일이 감독 자리에 앉았다. '트레인스포팅'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2009년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작품상을 수상하며 영화 인생의 정점에 오른 영국 출신의 대가다. 이 영화를 보면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보일은 좁은 공간과 한정된 인물이라는 극도의 제한 속에서 기이한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화면을 세 개로 분할해 지리멸렬해질 수 있는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고, 캠코더의 적절한 활용과 극단적인 클로즈업 등을 통해 긴장감을 이어간다. 보일은 "주인공이 움직이지 못하는 액션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액션'이라는 모순적인 문장은 93분 동안 스크린에 구현된다.
연출도 연출이지만 무엇보다 연기의 힘이 도드라진다. 얼굴의 모든 근육이 마치 웃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제임스 프랭코의 연기는 낙천 그 자체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자신의 모습을 캠코더에 녹화하면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고, 자신의 팔을 잘라낸(정확하게는 팔을 부러뜨리고 떼내는) 뒤에도 웃음 짓는 주인공 아론 랠스턴의 모습은 프랭코의 얼굴을 통해 현실감을 얻는다. 올해 아카데미영화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이 배우가 생애 최초로 오스카를 거머쥐어도 군소리가 나오진 않을 듯하다. 프랭코는 여배우 앤 해서웨이와 함께 아카데미상 시상식 공동 진행까지 맡았다. 그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 진풍경이 예상된다.
'127시간'은 남우주연상 외에도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각본상, 편집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17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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