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대 중반,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오만의 국경절 행사에 참석한 무바라크는 그때 이미 50대 후반인데도 카리스마 넘치는 풍모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이끈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 당한 1981년 권좌에 올라 30년 동안 이집트와 중동의 '안정'에 기둥 노릇을 했다.
무바라크는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해방 광장을 피로 물들인 민중 봉기로 벼랑 끝에 몰린 채 군부와 외세에 의지해 간신히 버티고 있다. 정보기관장 출신으로 과도기 체제 관리를 맡은 술레이만 부통령은 민중 세력의 "즉각적 권력 인수"요구를 거부, 무바라크의 명예 퇴진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미국과 서유럽도 오바마 대통령이 제시한'질서 있는 체제 이행(orderly transition)'에 힘을 모으고 있다.
서구가 권위주의 체제 버팀목
그러나 무바라크는 지난 해 한달 넘게 머문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병원으로 갈 것이라는 설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병을 핑계로 조용히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은 좋은 방책이다. 지레 민중 혁명으로 불린 이집트 사태는 그렇게 지배 세력과 민중 세력의 타협으로 마무리될 모양이다.
민중 봉기를 주도한 청년노동자단체'4월6일'과 최대 반정부 세력 무슬림형제단 등은 6일 술레이만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양쪽은 개헌위원회 구성에 합의, 제도적 타협에 의한 민주화 의지를 보였다. 개헌 일정이 빠듯하고,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체제 이행이 순탄할 리 없다. 다만 전통적으로 군의 신뢰가 높은 마당에 파탄을 예상할 건 아니다.
이집트의 역사적 변화는 1980년대 후반 동구권 혁명에 비유된다. 외세 침탈에 이은 권위주의 통치의 질곡을 민중의 힘으로 허문 것이 언뜻 닮았다. 2000년 대 중앙아시아의 '장미 혁명'등으로 이어진 민중혁명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찬사이다. 최근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에 이은 이집트 사태를 서구 언론은'로제타 혁명'이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이런 찬사보다 주목할 것은 서구 사회의 반성이다. 권위 언론과 학자들은 아랍권의 민주화 혁명이 동구 사회주의권보다 훨씬 뒤늦은 것은 서구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한다. 제국주의 시절 아랍권을 앞다퉈 침탈했던 서구는 2차 대전 이후 이 지역의 전제 왕정과 군부 독재를 적극 지원했다. 냉전 대결 명분을 내세웠지만, 석유자원과 이스라엘의 생존을 노린 허울의 성격이 짙었다.
이집트 사태의 근원을 헤아리는 전문가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의'개새끼 주의(Sonofabitchism)'을 새삼 거론했다. 루스벨트는 제3세계 독재자를 지원하는 정책이 비판 받자 "개새끼(son of a bitch)라도 우리 개새끼"라고 맞받았다. 제3세계의 민주적 발전을 되뇌는 서구의 위선을 상징한다.
서구는 중동의 권위주의 정권을 지원, 석유 등 전략적 이익을 지켰다. 반면 석유 부국을 제외한 아랍권은 권위주의 통치와 경제적 낙후, 극심한 빈부 격차의 수렁에 빠졌다. 소수 지배세력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모순은 국가 정통성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80년 대말, 튀니지 알제리 등에서 '빵과 자유'를 외치는 민중 봉기와 내전으로 수십만 명이 숨진 사태는 아랍권 전체의 위기를 반영했다.
아랍권 위기의 본질을 봐야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과 서구는 절박한 체제 개혁보다 이슬람 근본주의와 테러 세력의 위협을 부각시켰다. 9ㆍ11 테러는 이를 정당화했다. 그 결과, 민중의'빵과 자유'를 향한 갈망은 더욱 커졌고 튀니지에서 폭발했다. 최근 사태에 서구 사회는 자못 놀란 표정을 짓지만, 오래도록'봉인된 시간'에 갇힌 아랍권의 격동을 경고한 전문가들이 많다.
이집트의 민중 시위는 진정한 혁명에 이르지 못한 채 수습될 전망이다. 지배 세력과 외세가 함께 버티는 현실의 벽은 그만큼 견고하다. 이런 본질을 간과한 채 지레 민중 혁명을 칭송하거나, 트위터의 힘에 감탄할 건 아니라는 지적을 새겨 들을 만 하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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