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전 9시께 서울 여의도백화점 10층의 물품보관업체 S사 창고에 "폭발물로 의심되는 골판지 상자 2개가 있다"는 신고가 경찰 112센터에 접수됐다.
영등포경찰서는 강력팀과 타격대 등 20여명을 급파, 건물 내 시민들을 긴급 대피시키는 한편 폭발물처리반은 첨단장비를 동원해 상자 탐색작업에 들어갔다. 가로 36㎝ 세로 30㎝ 높이 20㎝ 크기의 상자 2개는 일단 폭발물은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상자는 골판지 재질의 우체국 택배용 포장박스였다.
폭발물 아니라 거액의 현금다발
그런데 상자를 둘러싼 테이프를 뜯는 순간, 뭉칫돈이 쏟아져 나왔다. 첫 번째 상자에는 5만원권 500장씩을 노란 고무줄로 묶은 돈다발 32개(8억원), 두 번째 상자에는 1만원권 1,000장씩을 묶은 돈다발 20개(2억원)가 들어 있었다.
물품보관업체 관계자는 "지난해 8월 사용료를 받고 이 상자들을 보관해왔다"며 "사무실 이전에 따라 한 달 전부터 물건을 찾아가라고 의뢰인을 수소문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혹시 폭발물일지 몰라 신고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보관 의뢰인 신원은 모두 허위
경찰 조사결과 이 업체의 물품보관증에 기록된 보관의뢰인의 인적사항은 모두 허위인 것으로 드러났다. '83XXXX-XXXXXXX, 강OO'으로 적힌 보관증의 주민등록번호는 조회 결과 가짜였다. 강씨의 휴대전화 역시 사용이 정지된 상태였다. 더욱이 의뢰인은 현금으로 1년치 보관료 201만9,600원을 한꺼번에 낸 것으로 드러나 처음부터 신원을 철저히 숨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술품 등 귀중품을 전문적으로 보관하는 이 업체는 신분증을 확인하지 않고 물품을 맡기는사람에게 직접 보관증에 신원을 적도록 하고 있어 문제의 의뢰인은 이러한 절차를 잘 알고 맡긴 것으로 추정된다. 물건을 찾을 때도 디지털 도어록에 저장한 의뢰인의 지문으로만 3.3㎡ 남짓한 개인보관실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경찰 조사결과 이 업체의 폐쇄회로TV 영상은 보관기간이 3개월로, 이 상자들을 맡긴 지 6개월이 지난 현 시점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상자에서는 지문도 채취되지 않아 의뢰인의 정체는 사실상 오리무중이다. 업체 관계자는 "상자를 맡긴 사람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로 기억하고 있다"고 경찰에 말했다.
수상한 현금다발의 정체는
의뢰인이 처음부터 신원 노출을 의도적으로 철저히 막은 점으로 볼 때 범죄자금 내지는 비자금이 유력시된다. 상자에 들어 있던 현금 10억원 중 대부분이 신권이 아니라 시중에서 사용되던 화폐여서 강ㆍ절도한 돈을 맡긴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개인이나 기업의 검은 돈 내지는, 돈을 맡긴 장소가 마침 여의도라는 점에서 정치 비자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경찰 관계자는 "휴대폰 명의자, 통화 내역 조사가 이뤄져야 (돈의 성격과 관련한) 수사를 확대할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이 휴대폰은 타인 명의로 만든 대포폰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10억원이란 거금을 종이상자에 넣어 6개월 가까이 되도록 맡겨놓고는 행방이 묘연해져버린 의뢰인의 정체, 돈의 성격과 행방 등이 자칫 미스터리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강윤주 기자 k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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