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은 버틸 것 같던 20세기의 대기획 마르크스주의는 1980년대가 저물기 전 속수무책 붕괴했다. 동유럽 정치 권력에서 시작된 균열은 몇 해 지나지 않아 극동의 지성에도 지진을 일으켰다. 변화의 속도는 허무하리만치 빨랐다.
<인터뷰, 한국 인문학 지각 변동> 은 1990년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에 불어닥친 탈태, 혹은 신생의 기록이다.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포스트주의까지, 지난 20년 동안 다종다기한 담론이 발아해 가지를 뻗어온 과정을 담았다. 김항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와 이혜령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HK교수가 함께 썼다. 인터뷰,>
한국 인문학의 궤적을 포착하기 위해 두 저자가 선택한 형식은 인터뷰다. "심포지엄을 개최하거나 각각의 연구자로부터 정돈된 글을 받는 방식으로는 조감도를 그릴 수는 있을지언정, 체험한 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고 이유를 밝혔다. 열 다섯 중견 인문학자와 대화를 나누고, 그 문답을 다듬어 책으로 펴내는 데 각각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인터뷰집이기에 묵중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초록이나 각주, 참고문헌 따위의 번다한 장치가 없다. 딱딱한 글읽기에 거부감을 갖는 독자에겐 반가운 일이다. 더불어, 인터뷰집이기에 이런 생생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초록과 서문에 이어 근엄하게 제 할 말을 시작하는 논문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솔직함이다.
"한 몇 년 저는 글을 한 편도 쓰지 못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강의를 하기 힘들었어요. 그전에는 내가 강의를 아주 잘 한다고 생각했고… 간단히 말해, 민족문학사 같은 걸 더 이상 못 가르치겠더라는 말이에요. 아, 정말 죽겠습디다. 뭔가 깊은 물속에 콱 처박혀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히고 그랬습니다. 문학평론가랍시고 이름을 내걸고 있었는데, 그것도 다 집어치웠어요."(김철과의 인터뷰ㆍ28쪽)
더러 중첩되고 어근버근 서로 버티기도 하는 학자들의 목소리는 오늘날 한국 인문학의 풍경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준다. 포스트 담론의 창궐, 근대성 논의의 홍수, 민족주의 비판과 파시즘 논의의 등장, 문화 연구와 페미니즘, 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전면화, 이른바 '인문학의 국제화' 드라이브 등 변동의 폭과 깊이가 학자들의 육성으로 기록됐다. 민족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조가 주류가 되면서 불거진 반민중주의적 경향, 한국적 변용 없이 수용된 각종 포스트주의 논의에 대한 반성적 비판이 굵은 둥치를 이룬다.
"(포스트주의는) '영미권에서 이게 요즘 뜬다더라'라는 식의 태도로 수입이 된 거죠… 지젝이나 아감벤 같은 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것은 어떤 실질적인 문제의식이 수반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것을 소개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왜 이런 담론이나 이론이 중요한지, 그것이 이런저런 현상들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분명히 이해하고 또 입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진태원과의 인터뷰ㆍ463쪽)
만만찮은 공이 들어간 이 책의 저술 작업을, 저자들은 "자기성찰의 과정이었다"고 적고 있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저 20년 동안의 변화와 변환의 과정이 갈수록 오리무중의 나락으로 빠졌기에 그렇다… 왜냐하면 이 인터뷰들은 여전히 그 지각변동이 현재진행형임을, 그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어긋남이 어떤 기울기를 보일 것인지를 열어 둔 채로 남겨 두어야 함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인문학이 어떻게 변화해가고, 대중과 소통의 접점을 찾고 있는지를 조망케 해주는 책이다.
그린비 발행ㆍ640쪽ㆍ2만5,000원.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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