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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설이 슬픈 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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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설이 슬픈 서민들

입력
2011.02.01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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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가고는 싶지만, 이미 마음은 그곳에 가 있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처지. 아마 이번 설엔 그런 망향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훨씬 많을 듯싶다. 정부는 올해 경기 회복에 긴 연휴까지 겹친 만큼 작년보다 많은 인원(약 3,100만명)이 움직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장 구제역이 문제다. 고향 부모들은 도시에 사는 자식들에게 손사래를 친다. 이번 설엔 오지 말라고. 하기야 자식 같은 소 돼지를 산 채로 묻었는데, 명절 쇨 기분이 날 리 없다. 구제역을 겨우 면한 동네 역시 행여라도 그 몹쓸 바이러스가 묻어 올까, 손주들 얼굴 보는 것조차 참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암도 정복한다는 21세기에, 그것도 최첨단 IT강국인 대한민국에서, 역병 때문에 가족들이 생이별해야 하는 이 현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구제역이 아니라도 그렇다. 서민들이 이토록 힘들었던 때가 과연 근래에 또 있었을까. 서민의 범주가 모호하긴 하지만, 통념상 저소득 무주택자로 규정한다면 이들의 지금 삶은 10여년전 외환위기나 바로 몇 해전의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도 훨씬 버거워 보인다.

물가가 원수다. 가격이 두 배로 뛴다면 내 구매력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래서 인플레는 흉기만 들지 않았을 뿐, 내 지갑 속 돈을 빼앗아가는 강도와 다를 게 없다. 더구나 물가상승은 무차별적이기 때문에, 부자보다는 서민들에게 더 가혹하다. 이렇게 물가가 뜀박질하는데, 그래서 쓸 수 있는 호주머니는 점점 가벼워지는데, 서민들로선 명절과 귀향이 두려울 뿐이다.

더 잔인한 것은 전세 값이다. 집 없는 서민들만이 느끼는 고통이다. 일반 물가야 덜 먹고 덜 쓰면 된다지만, 집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요즘 집주인들이 올려달라는 전세보증금은 보통 3,000만~5,000만원. 가계부는 늘 적자인데, 집을 사는 것도 아니고 단지 전세보증금 올려주기 위해 매달 200만원씩을 저금해야 하나? 어차피 저축으론 안될 텐데, 금리도 계속 오르는 판국에 또다시 대출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은행에서 대출을 거절하면, 결국 부모 형제들한테 부탁해야 하나? 고향 갈 기분도 아니고 면목도 없지만, 손을 벌리기 위해서라도 내려가야 할까? 생각하면 할수록 신세만 처량할 뿐이다.

정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친서민'을 얘기하고 있다. 자동차보험료에도, 카드수수료에도, 골목상권 문제가 터지고 심지어 치킨 값 논란이 불거져도, 친서민의 관점에서 처방을 내린다. 하지만 친서민을 체감하는 서민이 과연 있기나 할까. 후진국 가축질병에도 속수무책인 정부, 물가에 이미 불이 붙은 뒤에야 호들갑을 떠는 정부, 전세대란에 눈물 흘리며 빚을 내거나 아니면 싼 곳을 찾아 이삿짐을 싸야 하는데도 '더 이상 대책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정부에게서, 과연 어떤 서민이 친서민을 느끼겠는가.

물가안정, 주거안정 없는 서민정책은 다 허구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인플레이션이 4%를 넘고, 주거 임대료가 수십%씩 치솟는 선진국은 없다. 명절이 반가운 경제, 귀향에 마음이 설레는 경제, 그런 경제가 진짜 친서민경제다.

이성철 경제부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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