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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칼럼] 방앗간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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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칼럼] 방앗간 추억

입력
2011.02.0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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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살던 집 옆에 방앗간이 있었다. 내 방이 바로 그 방앗간과 벽을 맞대고 있었는데, 방앗간이란 게 얼마나 시끄러운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세를 들이려고 연탄광 자리에 만들었던 그 방에 사람이 들자마자 그 다음날로 짐을 꾸려 나가버렸을 정도였다.

매일 밤 시끄럽지는 않았을 터인데, 아마도 무슨 대목 무렵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아무리 싼 값이라도 그 시끄러운 방에는 아무도 살려고 하지는 않았으므로, 식구 여섯이 한 방 두 방에 몰려 살던 가난한 시절에 운 좋게도 내 방을 갖게 되었다.

내 유년의 방을 덜덜 떨게 했지

그 방, 명절대목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추억이라, 명절만 돌아오면 벽이 덜덜 떨리고 방바닥이 들썩들썩하던 그 방이 기억난다. 떡쌀이 눈처럼 쌓여 있던 함지박이며, 기계에서 쿨렁쿨렁 쏟아져 나오던 가래떡이며, 축축하던 냄새와, 발가락이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까지 다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에 설날처럼 좋은 날이 어디 있었을까. 설날 전날 밤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당최 잠을 이룰 수 없었는데, 해 보내는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게 센다는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 다음 날의 세뱃돈 벌이를 기다리는 마음 때문이었다.

방앗간에서 뽑아온 가래떡은 굳기를 기다려, 밤이 늦어서야 썰 수 있었다. 굳은 가래떡을 써는 일이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는 모든 어머니들이 누구나 다 한석봉 어머니 같아서 딱딱 썰어내는 떡이 그렇게 가지런할 수가 없었다. 그 떡 예쁘게 썰어지는 것만 보느라고 한석봉 엄마 같은 내 엄마, 손바닥이 빨갛게 부풀어 오르다가 물집 잡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식구가 많아 뽑아온 가래떡도 많고, 썰어야 할 양도 많았다.

그 짬짬이 또 김치와 돼지고기 다지고, 밀가루 반죽 밀고, 넉넉히 만두도 빚어야 했다. 남쪽 지방에서는 설에 만두 먹는 풍속이 없다던데 서울 살던 우리는 설마다 만두 없는 떡국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만두라는 게 들이는 공에 비해 입 속으로 들어가는 속도가 너무 빠른 음식이라, 한 끼 먹을 만두를 빚기 위해 밤을 새워야 할 지경이었다. 밀어놓은 밀가루 반죽에 주전자 뚜껑을 눌러 동그란 만두피를 만들던 기억도 난다. 계란 흰자를 풀어 붙이면 만두피가 잘 붙는다는 걸 알지 못하던 시절이라, 터지지 않는 만두를 빚는 것도 일이었다.

어디 떡국 끓이고, 만두 빚는 일뿐이었으랴. 전도 부쳐야 하고, 나물도 무쳐야 하고, 산적도 만들어야 하니, 일도 일이지만 돈 마련이 더 큰 근심이었겠다. 어린 애기들 설빔도 해 입히고 세뱃돈도 줘야 할 일이었다. 대목만 다가오면 일이 많아 잠 못 이루는 게 아니고 방앗간 시끄러워 잠 설치는 게 아니라, 끊이지 않는 한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한석봉 같던 내 엄마, 그 세월을 모두 보내시고 올해 여든여덟이 되셨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 노인의 신체 변화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가 있었다. 노인이 되면 피부의 정맥, 모세혈관, 세동맥 등 혈관계의 밀도가 감소하고, 그런 까닭으로 피부가 얇아지기 때문에 얼굴의 온도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글 쓴 이에 따르면 노인들이 따스하게 느끼는 온도는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온도보다 3도에서 6도쯤이 높다고 한다.

설날엔 어머니 생각 더 한다네

내 어머니는 너무 많이 늙으셔서 어쩌면 얼굴의 온도가 6도에서 9도쯤은 더 낮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 어머니의 얼굴을 만져본 게, 그리고 그런 어머니에게 내 얼굴을 만져보게 한 게 언젯적의 일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설날이다. 나이 들어 이제는 설날이 반가울 까닭이 하나 없고 심지어 명절 다가오는 게 성가시기까지 한데 그래도 감사한 건, 명절이라도 다가와야 그나마 부모님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고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 세상에 부모 없는 사람 없으니, 모두들 마음이 다 그렇겠다. 모두들, 다른 때보다 3도에서 6도쯤이 높은 설날 되시기를 바란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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