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좌제, 나로서는 여간 끔찍한 말이 아니다. 그건 눈에 안 보이게 전신을, 온 마음을 옥죄고 드는 가시고 쇠사슬 같은 것이었다. 지겹고 무섭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그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난다. 내가 스스로 저주스럽기도 한다.
연좌제는 한자로는 連坐制라고 쓴다. 연은 연계(連繫)의 연이고 연루(連累)의 연이라서, 무엇인가 여럿이 서로 연달아서 엮이고 얽히고 한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같은 범죄에 연루되었다면, 여러 사람이 같은 죄에 말려든다는 뜻이 된다. 좌(坐)는 보통은 좌(座)와 다를 바 없이, '앉을 좌' 또는 '자리 좌'라고 읽지만, 다르게는 '죄입을 좌'라고 읽기도 한다.
좌죄(坐罪)라면 죄를 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연(連)과 더불어서 두 글자 합쳐서 연좌가 되면, 같은 죄에 여러 사람이 줄줄이 말려든다는 것을 가리키게 된다. 여러 사람이 한 오랏줄에 묶이는 것이다. 조선 왕조시대에 연좌제는 극악했다. 가령, 역적으로 몰리면 삼족, 이를테면, 친가, 외가, 처가의 가족들이 모두 죄인으로 몰렸다. '삼족을 멸한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 같은 흉악한 연좌제가 현대에서도 국가제도로 발악을 했다. 이른바, 자유당 시대에 그랬었다. 그것도 다른 범죄가 아니고, 이른바, '반공법 위반'에 걸려든 범죄의 경우, 그랬었다. 그러니, 그 당시의 한국은 조선왕조 시대와 별로 다를 게 없었던 셈이다.
60 년대 초반이다. 나는 그 당시 치안국의 특정과라는 데서 호출을 당했다. 잡혀 가는 게 아님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고는 출두했다. 서울 남대문 근처의, 웬 깊숙한 골목 안에 자리 잡은, 여느 민가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건물 안에 들어섰다.
자그마한 방에 책상을 사이에 놓고 담당 경찰관과 마주 앉았다. 그는 자신의 직함을 대면서 경위라고 했다. 성은 이라고 했다. 부친 때문에 불렀다고 하면서 꼬치꼬치 캐물었다. 마지막으로 헤어진 게 언제냐? 근자에 무슨 연락 없었느냐? 등등 물어대더니, 나 혼자 남겨 놓고 나갔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 다른 경찰관이 들어 왔다. 앞서와 꼭 같은 질문을 하는 게 나는 지겨웠다. 나도 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두 번 진술을 하게 강요한 것은 모르긴 해도 내 진술에 서로 어긋남이 없는가를 따지기 위해서라고 짐작되었다. 그러더니 마지막으로는 내가 진술한 말에 허위가 없음을 문서로 서약하라고 했다.
그런데다 쉽게 돌려 보내주지 않았다. 나 혼자 내버려 두었다. 가뜩이나 흰 벽의 좁다란 방에 백열등이 이글댔다. 온 몸으로 그 눈부신 불빛을 받아내어야 했다. 그나마 여간 긴 시간이 아니었다. 초저녁부터 통금 시간 직전의 야밤중까지 그래야 했다. 온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중에 누가 들어오더니 집으로 가도 좋다고 했다.
깔고 앉았던 딱딱한 나무 의자에서 일어서려는데,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공교롭게 앓고 있던 치질이, 심하게 잘 못되어서 터진 피가, 옷 바깥으로 번져서는 의자에 달라붙은 탓이었다. 피는 허벅지까지 얼룩져 있었다.
비참했다. 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는 아무 죄를 지은 게 없는 선량한 시민인데 도 그렇게 하반신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고초를 당한 것이 억울했다. 나는 간접적으로 고문당한 것이나 다를 것 없다고 투덜댔다.
그런 일이 자그마치, 세 차례 반복되었다. 불려가고 또 불려가기를 거듭해야 했다. 그러던 중, 세 번째 되던 날, 조사 받든 중에 내가 견디다 못해 대들었다. "아무리 우리 아버지 때문이라지만, 죄라고는 추호도 없는 아들을 피의자 삼아서, 괴롭히는 게 말이나 되느냐. 명색이 교수로서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공산주의를 혐오하기로는 당신들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할 것 없는데도…."
나는 그렇게 책상을 치면서 항변했다. 지금 생각해도 나와 같은 겁 많은 약골이 어쩌자고 그런 대담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내 고함소리가 좁은 방안을 울리자, 담당관이 움칫, 몸을 사렸다. 표정이 굳어졌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날은 그걸로 심문이 끝나고 나는 풀려 날 수 있었다.
그러고는 한 동안, 잠잠했다. 그러다가 추석을 하루 앞둔 밤에 뜻밖에 나를 담당하던 치안국의 바로 그 이모 경위가 느닷없이 우리 집을 찾아 왔다. 나는 또 무슨 사건인가? 하고 겁부터 먼저 먹었다.
"왜 나를 안 부르고요? 이번엔 무슨 일이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겁니다."
의아해하는 나를 달래듯이 그는 말했다.
그는 응접실에 마주 앉아서는 이것, 저것 잡담을 늘어놓았지만, 나는 그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궁금증이 더할수록 마음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 덮씌우는 가운데, 한 동안 시간이 지나갔다. 한데, 한참 뒤였다. 지역 경찰서에서 왔다면서 형사들이 둘씩이나 들이닥쳤다. 우리 아버지 때문에, 사찰을 하러 온 것이라고 했다.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이 경위가 나섰다. 자기 신분을 밝히면서 형사에게 말을 걸었다. "이 집은 내 소관이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들은 그냥 돌아가시오."
두 형사가 말없이 나가는 걸 보고 나는 뭐가 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뜨악해 있는 나에게 이 경위가 말을 건넸다.
"이제 아시겠죠. 오늘 내가 왜 왔는지."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추석 같은 명절에는 사전에 김 교수 같이 연좌제로 말썽이 있는 사람들은 경찰이 직접 조사를 하게 되어 있기에 이 경위는 혹시나 해서 일부러 찾아 왔다고 했다. 한데 왜 그가 나를 이토록 보아주는 걸까?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의아해하고 있는 눈치를 알아차린, 이 경위가 말했다.
"그 전에 교수께서 당당히 항변하고 대든 것에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제부턴 제가 지켜드릴 것입니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포도주를 내다가 그를 대접했다. 큰 절까지 하면서 융숭하게 접대했다. 아니 모셔 받들었다. 그 해 추석에 달은 유달리 우리 집 뜰을 밝게 비추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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