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의 길은 없나
정치권의 복지 논쟁이 소모적이고 정략적으로 비칠지라도 무시하거나 폄하할 수만도 없다. 우리 삶의 질을 바꾸는 원동력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걸 정치권에 내맡길 수도 없다. 자칫하면 선동적 구호로 보편과 선별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줘 오히려 국론만 분열시킬 수 있다.
한국일보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공동 기획한 '대한민국, 복지의 길을 묻다' 릴레이 좌담의 토론자인 김연명 중앙대 교수, 최균 한림대 교수, 홍경준 성균관대 교수의 보편ㆍ선별 논란에 답변은 다르지 않았다. 보편주의 바탕 위에 선별적 원리가 결합된 '선별적 보편주의'(selective universalism)가 그 답이다. 보편과 선별이 배타적인 게 아니라, 두 원리가 조화돼야 튼튼한 복지가 완성된다는 게 이들의 진단이다.
양극화 속 국민 복지수요 증가
사회(김미곤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정치권을 중심으로 복지논쟁이 뜨거워지는 배경은 무엇인가.
홍경준= 과거 전두환 정권의 국정지표도 복지국가 건설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복지 얘기는 오래된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건 복지수요가 민심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고성장에도 양극화는 심화하면서 교육 주거 일자리 노후 안보 등 5대 불안이 지속되고, '747'(7% 성장·4만달러 국민소득·세계7위 경제대국) 공약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에서도 체감경기가 나아지지 않자 삶의 질 개선을 위해서는 복지가 대안이라는 기대가 많아진 것 같다.
김연명= 정치공학적 흐름에서 보면 국민들의 복지 욕구가 높아진 것이 정치권의 담론 선점 경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해 경기도 교육감의 무상급식 논란 이후 복지 아젠다의 중요성이 확인되자 정치권에서는 내년에 예정된 총선과 대선에서의 의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복지 논쟁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념에선 대립하되 제도에선 조화돼야
사회= 보편·선별 논쟁이 뜨겁다. 보편과 선별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가.
최균= 보편·선별을 논하기에 앞서 복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사회복지, 즉 사회보장정책은 크게 공적부조 사회보험 사회서비스 등 세 분야로 나눈다. 공적부조는 기초생활보장이나 기초노령연금처럼 주로 빈곤에 의해 발생한 사후적 위험에 대응해 특정 빈곤계층을 지원하게 되는데, 세금을 낸 사람과 수혜를 입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선별주의라고 말한다. 사회보험은 건강보험처럼 미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보험료를 거둬 사고를 당한 이들에게 보험혜택을 주는 것으로, 모두 내고 모두 받는다는 측면에서 보편주의 방식이다. 사회서비스는 노인 장애인 아동 등에 지원되는 여러 서비스다. 이미 국내 복지 체계 안에 보편과 선별이 모두 도입돼 있다는 뜻이다.
홍= 학문적으로 보편적·선별적 복지는 복지급여의 '이념형적 할당원리'에 의해 구분된다. 보편 복지는 복지 급여가 하나의 사회적 권리로서 국민이라면 누구나 받아야 한다는 원리에 기초한 것이고, 선별 복지는 소득·재산 조사에 의해 특정된 개인에게 급여가 주어줘야 한다는 논리에서 출발한다. 이념적 기준이다 보니 구체적 제도를 언급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논쟁이 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 특정 제도를 도입할 때는 보편과 선별이 결코 양립하지 않는다. 유럽 복지국가 형성의 토대가 된 1942년 영국의 베버리지 보고서가 대표적 예다. 이는 향후 영국의 통합 사회보험체계의 근간이 된 것으로, 모두가 똑같이 보험료를 내고 똑같이 받는다는 점에서 보편이 맞지만, 정부가 보조하는 보험료 기여분은 고소득자가 휠씬 많이 낸 세금을 투입한다는 측면에서 선별적 복지 개념이 같이 내장된 것이다.
보편·선별, 정치권 논쟁은 필수적
사회= 정치권에서 제기되는 보편·선별 논쟁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 정치권에서 보편과 선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건 넌센스다. 한 제도 안에도 정책 효율을 높이기 위해 보편과 선별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보육지원서비스가 대표적이다. 국가가 모든 보육시설에 대해 인건비 등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보편주의에 기초하면서도, 부모가 내는 보육료는 소득수준(소득하위 70% 이하까지)에 따라 차등 적용된다는 점에서 선별 개념이 들어가 있다. 65세 이상 노인에게 지급되는 기초노령연금의 경우도 소득·자산에 따라 전체 노인의 70%에게 차등 지급되는데, 특정 대상을 가려낸다는 점에서 선별이지만, 다수를 위해 소수만 제거한다는 면에서 보편 성향이 강하다. 이미 우리나라는 전체 제도의 틀뿐만 아니라 개별 정책에서도 선별과 보편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최= 한국일보 설문조사(1월 25일자 1·4면)에서도 나왔지만, 우리나라의 사회적·문화적 특성을 보면 복지가 확대돼야 한다는 데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감한다. 헌데 정치권은 마치 보편과 선별이 같이 갈 수 없는 것처럼 규정하고, 마치 국민들이 보편과 선별 중 한쪽에 줄을 서야 하는 것처럼 만들고 있다. 특히, 무상급식의 경우 찬성하면 좌파, 반대하면 우파처럼 여기는 풍조까지 생길 정도로 문제의 본질이 변질되고 있다. 이런 식의 논쟁이 지속되면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대안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홍= 현 논쟁이 정파적이고 표피적이라고 하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먼저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변화가 필수적이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는 폴 크루그먼 교수는 1970년대 이후 진행된 미 중산층 몰락과 소득 양극화는 경제적 구조 변화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정치 양극화에 따른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복지 체계의 변화는 결국 정치권의 활발한 논쟁이 전제돼야 하고, 이것이 패러다임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다.
복지의 기본틀은 보편주의
사회= 보편과 선별이 양립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그럼 어느 쪽에 무게를 둬야 하는가.
김= 우리 현실을 고려할 때 보편적 복지가 필수적이다. 첫째, 수출주도형 개방경제 하에서 세계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구조조정이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의 실직자 직업훈련과 소득보장을 완비하려면 보편적 복지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그래야 노동유연성이 확립되고 성장 동력이 유지된다. 둘째, 보편적 복지 지출은 낭비가 아니라 사회투자 측면에서 중산층 이하의 내수 소비를 늘려 다시 투자와 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라는 점에서 선별보다 효과가 우월하다. 마지막으로 보편적 복지 시스템이 선별보다 소득 재분배 효과가 크다. '재분배의 역설'(paradox of redistribution)에 따르면 특정 계층에만 급여를 주는 선별적 시스템의 소득불평등 해소능력이 나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편 시스템이 발달한 나라가 경제 활성화와 조세체계 합리화 등과 맞물려 소득불평등 개선 효과가 높다.
보편복지로 가기 위해 선별적 확대 필수
홍= 사회적 권리라는 점에서 보편적 복지를 선호한다. 사회 연대성을 강화하고 복지 지출의 행정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크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각 나라의 산업구조, 노동시장, 사회계층 등의 변화에 따라 보편적 복지라도 그 내에서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편 복지의 대명사인 스웨덴의 경우 보편적 복지를 계속 취하면서도 재분배 기능이 바뀌어왔다. 1930, 40년대 사회보험의 경우 소득에 따라 달리 내고(소득비례기여), 급여는 똑같이 받는(정액급여) 구조였다. 즉, 수직적 소득 재분배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당시에는 빈부격차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50년대 들어서는 소득비례기여·소득비례급여 방식으로 바뀌었다. 급여를 부자에게 더 주는 시스템으로 바뀐 것인데, 이는 이미 그 사회 구조가 부자가 더 내고 더 받아도 될 만큼 바뀌었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에서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이 확보돼 소득불평등이 크게 해소된 게 시스템 변화의 원동력인 것이다. 보편과 선별을 갈라서도 안 되지만 보편이라고 해서 다 같은 보편이 아니라는 얘기다.
최= 장기적으로 보편적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선별적 확대는 불가피하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재정이 제약된 상황에서 효율적 분배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에게 자원을 집중하는 선별주의가 필요하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그간 전국의 3.3%(158만명)가 혜택을 받는 기초생활보장 등을 통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 게 사실이다. 보편적 접근을 강화하다 보면 꼭 욕구가 필요하지 않은 계층에게까지 지출이 이뤄져 단기적으로 돈은 쏟아부으면서도 효과는 크지 않은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국가 재정상황을 볼 때 당장 보편주의로 가기에는 무리고, 보편이 만능이 아니다.
무상급식, 보편·선별 논란 핵심 아니다
사회= 보편·선별 논쟁과 함께 무상급식에 대한 찬반 논란이 뜨겁다.
김= 무상급식은 당연히 해야 한다. 이미 앞서 언급한 기초노령연금과 보육료 등은 이미 보편주의이거나 그런 틀 안에 근접해 있다. 효율성을 언급하는데, 자라나는 아이들의 급식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는가. 또 효율보다는 사회통합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빈곤층에게 절망감과 무력감을 줄이고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차원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물론 무상급식 문제가 보편·선별 논란의 핵으로 자리잡는 건 반대다. 무상급식은 대상자 전원이 돈을 내지 않는 극단적 보편주의의 한 예일 뿐이다.
최= 반대한다. 가장 큰 이유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 측면이다. 제한된 자원에서 더 급한 데가 적지 않다. 무상급식에 대한 욕구 차원에서도 적절치 않다. 공짜밥을 주는 게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재원을 더 효율적인 데 쓰자는 것이다. 빈곤층 자녀에 대한 낙인효과가 문제라면, 무상급식 대상자 선별 ?서류 작업을 학교가 아닌 행정기관에서 하면 된다.
재벌 손주 공짜밥 논리로 접근해선 안 돼
홍= 세금 낸 사람의 권리 측면에서 접근하고 싶다. 급식 문제를 재벌 손주에게 왜 공짜밥을 주냐는 식으로 몰고 가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재벌은 세금을 더 많이 냈으니 당연히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특히, 무상급식 찬성의 주요 계층이 수도권 30, 40대로 알고 있는데, 이들은 그간 세금은 내는데 혜택은 거의 받아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다. 복지 혜택이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제대로 알리는 측면에서도 중산층 이상까지 무상급식을 하는 게 맞다고 본다. 혜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증세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된다.
민주당 '3+1' 정책, 공급자 통제 부족
사회= 정치권에서 제기되는 복지 공약에 대해 평가한다면.
김= 민주당의 '3+1'(무상급식·의료·보육+반값 대학등록금) 복지공약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민주당 안대로 지출을 늘릴 경우 자칫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될 수 있다. 보육시설의 경우 90%가 이윤을 추구하는 민간기관인 상황에서 무상 서비스를 확대하더라도 소비자 지출은 각종 특기적성비용 증가로 인해 줄지 않을 수 있다. 건강보험 혜택이 늘어도 소비자 부담이 쉽게 줄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급자를 제대로 통제하지 않고는 복지지출이 많아져도 소비자의 복지 체감도는 높아지지 않을 수 있다.
최= 민주당의 무상 복지에 소요될 예산은 30조원 수준(민주당은 16조2,000억원 주장)으로 파악되는데, 지난해 보건복지부 예산이 20조원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지나친 정치적 구호로 끝날 수 있다. 민주당이 보편 복지를 외치고 있지만, 실제 안을 들여다보면 선별적 복지를 확대하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한나라당, 명확한 대책없이 비판에만 급급
홍= 문제가 있긴 하지만, 민주당은 한나라당에 비하면 나름대로 현실적이다. 한나라당과 달리 복지 재원 문제를 언급함으로써 복지 논쟁을 보다 현실성 있게 이끌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반면, 한나라당은 재원 문제에 대한 언급 없이 민주당 안을 비판한다는 측면에서 논쟁의 흐름을 외면하고 있다.
김= 사실 한나라당이 더 큰 문제다. 집권 여당임에도 복지 정책을 주도하지 못하고, 야당이 들고나온 정책을 반대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책임 있는 집권 여당의 모습이 아니다. 여권에서 맞춤형 복지라는 얘기도 꺼내 놓았는데 사실 수사적 구호 이상의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사회보장기본법 개정안은 복지영향평가제 등 관리감독체계 강화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지만, 소득보장은 '낡은 복지'라고 판단하고 사회서비스 측면만 강조하는 것은 전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사회서비스는 소득보장 시스템 위에 얹혀줘야 복지 효과가 제대로 나타난다.
정리=박기수기자 blessyou@hk.co.kr
사진=홍인기기자 hongi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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