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가족 다시 찾은 주진관씨8년 전 사기대출 누명 써 18개월 수감 후 무죄 석방그 사이 회사·가족 다 잃어 쪽방서 발명품 개발 몰두고효율 전원장치 양산 앞둬 "모처럼 장남·아버지 노릇"
"설이 이렇게 설레기는 처음입니다. 오랜만에 사람 노릇 한번 하게 됐습니다."
명절에 장남, 아버지 남편 노릇 한번 하는 게 무슨 대수인가 싶지만 올해 예순넷의 주진관씨는 코앞으로 다가온 설날에 펼쳐질 풍경만 생각해도 가슴이 뛴다. 달라질 거라곤 떳떳하게 가족을 마주하고 부모님 산소 한번 찾는 것뿐.
그러나 예까지의 길에서 겪은 풍상이 주마등처럼 스치니 다시금 감회가 새롭다. 번듯하던 사업을 8년 전 동업자의 배신으로 말아먹고, 그도 모자라 누명으로 감옥에서 1년 반을 보내면서 생긴 그의 긴 방황이 고효율 전원공급장치 발명으로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이다. 그의 기막힌 사연(본보 2006년 3월31일자 8면)은 2003년 말로 거슬러간다.
당시 자동판매기 임대업을 하던 주씨는 대출사기 혐의로 출근길에 구속됐다. 검찰은 사기로 기소했고, 주씨는 1심에서 징역4년 형을 받았다. 동업자들이 자신 몰래 사기 대출을 한 것이었다. 장손으로서 모시던 집안 제사 10여개를 동생에게 넘겨야 했다.
상황이 반전된 건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2005년 5월. 서울고법이 주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몸은 자유가 됐고, 이듬해 3월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 마음도 자유로워졌다. 거기까지였다.
감옥에서 보낸 18개월은 이미 많은 것을 앗아갔다. 수감 중 부인으로부터 이혼을 당했고, 동업자들도 모두 등을 돌렸다. 대표로 있던 한국식품자동판매기업중앙회와 회사는 공중분해 된 뒤였다. 국가 보상도 없었다.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자판기 제작관련 특허 3건, 실용신안등록 5건, 의장등록 5건 등을 보유해 업계에선 손꼽히던 그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을 믿었죠. 그 덕인지 월세 15만원에 방을 얻었다"고 했다. 사업을 하면서 그의 정직함을 기억하던 이들이 십시일반 도운 결과였다.
발 뻗으면 벽 닿는 여관방이었다. "두 딸과 아내 등 가족을 되찾고 회사를 살려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꿈을 꾸기 시작한 지 1년여, 2006년 말 그는 배터리를 이용한 이동형 자판기 개발에 몰두하다 배터리를 보다 길게 사용할 수 있는 보조장치를 우연히 발명했다. 자판기업계는 물론 배터리를 이용해 불을 밝히는 포장마차 업주들은 "그런 게 있으면 바로 구입해 쓰겠다"는 반응이었다.
돈과 편견이 문제였다. 주변에선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거스르는 황당무계한 발상" "미친놈, 사기꾼"이라고 헐뜯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주씨는 사무실과 연구실을 겸한 5평 남짓한 영등포 한 상가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실험에 매달렸다. "실제 배터리 수명을 이론상의 수명에 보다 근접시킨 것일 뿐 에너지보존의 법칙을 거스른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같은 설명으로 옛 동업자들로부터 투자도 받고 한국기계전기전자시험연구원의 시험까지 마쳤다. 시험에서 주씨의 발명품은 300W 전구에 3시간1분동안 전원을 공급했다. 주씨는 "이 장치를 뺐을 땐 2시간을 넘기기 어려웠다"며 "매연과 소음 때문에 내연기관 발전기의 사용제한을 받고 있는 서울 강남 등 도심 포장마차들이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씨는 이 원리를 전기자동차 등 배터리를 이용하는 모든 제품에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또 다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주씨는 최근 경기 김포시에 공장으로 쓸 건물을 임대해 생산설비를 설치했다. 각종 배터리를 1.5배 가량 길게 쓸 수 있는 고효율 전원공급장치 양산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환갑을 넘긴 주씨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선사한 건 역시 가족이다. 맏딸 선민(34)씨는 "아버지한테 죄가 있다면 사람을 믿은 죄밖에 없다"며 "2009년 여관방에서 지금의 구로동 집으로 모시고 그간 저축한 돈으로 연구비를 댔다"고 했다. 주씨가 머쓱했는지 올 설 계획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이번 설에는 식구들과 함께 10년동안 찾지 못한 경남 진해의 어머니 묘소, 3년 전 장례식 이후 찾지 못했던 아버지 묘에 술 한잔 올릴 겁니다." 부녀의 웃음이 그의 발명품마냥 길게 퍼졌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글ㆍ사진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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