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5년(인조 13년) 8월 영의정 윤방(尹昉)과 최명길이 경연에서 "이황(李滉)이 상중에 서자를 낳아서 이름을 상동(喪童)이라고 했다"고 했다. 이 소문을 듣고 영남사림들은 격분했다. 근거없는 말을 날조해 선현을 무함했다는 것이다. 이에 영남사림들은 대대적인 변무소를 기획했다. 이른바 퇴계변무소가 그것이다.
1635년(인조 13년) 8월9일 인조는 경연에서 최명길은 인조에게 이이를 꺼리는 다른 이유가 있는가를 묻자, 이귀(李貴)가 생전에 "이이에게는 상중에 아이를 가졌다는 비방이 있다"고 한 말을 들었다고 했다. 당황한 최명길은 항간에 이런 말이 있기는 했지만 이황을 두고 하는 말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승지 한필원(韓必遠)은 이는 정인홍(鄭仁弘)이 이황을 무함하기 위해 한 말이라 했고, 최명길은 "이귀의 말은 곧 이황을 가리킨 것이지, 이이가 아닙니다. 이귀도 이황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일찍이 이황이 이런 무함을 받았다는 말이었습니다"라고 했다.
퇴계변무소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조목(趙穆)의 문인 김중청(金中淸)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영남사림들은 정보가 어두워 영의정 윤방을 무함의 수론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아본 결과 상동설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되자, 강경론자였던 정경세(鄭經世)의 문인 이찬(李燦) 이환(李煥) 형제나 도산서원 원장 김광계의 조카 김초(金礎) 등이 상소 반대로 돌아섰다.
그러나 영주ㆍ예안의 강경론자들은 상소를 강행하고자 했다. 다만 사론의 적극적인 지지는 받지 못했다. 정경세가 정인홍이 상동설로 이황을 무함하는 소리를 듣고 이를 변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정경세는 퇴계연보에 "첩의 아들 아무개가 아무 해에 태어났다"고 추록했다. 이것은 강경론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이 때문에 정경세 문인 이환은 병을 핑계로 소두를 사피했고, 새로 소두로 낙점된 장현광의 문인 신흥망ㆍ장경우도 행공을 회피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공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퇴계변무소보다는 후금침략이 예상되는 비상시국에 국력과 민심을 한데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경론자인 김중청 문인들은 박돈(朴焞)을 소두로 삼아 봉소를 서둘렀으나 중도에 상동설의 주론자가 윤방이 아니라 최명길이라는 것을 알고 소사(疏辭)의 8할을 바꾸는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동년 12월2일에 봉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명길은 즉시 자변소를 올려 영남유소를 조목조목 비판, 사실상 기존의 입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번 상소는 이황이 아닌 정인홍을 신원하려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더구나 정온(鄭蘊)이 유진(柳珍)으로부터 상동설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들추어냈다. 상동설을 기정사실화하려 한 것이다. 이리하여 퇴계변무소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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