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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태의 사진으로 본 한국현대사] <13> 톈안먼 사태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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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태의 사진으로 본 한국현대사] <13> 톈안먼 사태의 기억

입력
2011.01.3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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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일간스포츠 사진부장 대우로 정년을 맞았다. 이때가 주민등록 나이로 만 58세. 일간스포츠에서 정년 퇴임을 한 후 다시 한국일보 계약기자로 근무하던 내게 창간을 준비 중이던 세계일보에서 연락이 왔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흡수 또는 폐간됐던 언론사들이 1987년 말 6ㆍ29선언으로 복간과 창간을 시작한 것이다. 1988년에 한겨레와 국민일보가 창간됐다. 이듬 해2월, 당시 창간을 준비하던 이억순 세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분위기도 바꾸고 계약직보다는 스텝으로 현장을 더 뛰고 싶은 마음에 사진부장 대우를 받고 신생사 세계일보에 둥지를 틀게 됐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창간사의 활력이 느껴지던 6월, 조규석 특집부장과 함께 옌벤 재중동포 취재를 위해 중국 출장 길에 올랐다. 그런데 내게는 큰 사건만 따라다니는 모양이다. 6월 3일 저녁 10시 반 경, 베이징 공항에 내리는데 주변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꺼내 드는데 재중동포 운전기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카메라 꺼내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큰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마음대로 사진을 찍다가는 우리 모두 죽습니다."

안내원의 만류에 따라 카메라를 집어 넣고 베이징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한 민족반점으로 향했다. 8층 2833호실에 여장을 풀고 창 쪽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니 톈안먼 광장 근처에 있던 시위 군중들이 점차 늘어나며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큰 일이다. 한 번 나가봐야겠어.' 본능적으로 큰 사건임을 감지한 내가 주섬주섬 카메라를 챙기고 있는데 안내원이 숨을 헐떡거리며 호텔 방으로 뛰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군인들이 몰려옵니다." 동시에 호텔에서도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손님 여러분.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창 쪽으로 난 불을 모두 꺼주시기 바랍니다. 밖에서 사고를 당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기자가 이런 상황에서 호텔 방에 처박혀 있을 수만은 없다. 조용히 불을 끄고는 카메라를 챙겨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 톈안먼 쪽을 바라보니 학생과 시민들이 설치한 바리케이트는 이미 시커먼 불길에 휩싸인 채 그림자만 너울거리며 톈안먼 광장을 비추고 있었다. 30여 분이 지났을까. 광장 한 켠에 서 있던 장갑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따따따따...' 소리와 함께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숨을 죽이며 한 컷 한 컷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를 터뜨릴 수 없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셔터를 눌렀다. 한 시간여 지난 후 간헐적인 총소리와 함께 탱크와 장갑차에서 한 무리의 무장 군인들이 내리더니 광장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달 빛 한 점 없는 깜깜한 어둠이라 필름을 투 스텝 증감시켜 렌즈를 들여다보는데 군인들이 호텔을 향해 사격하는 모습이 앵글에 들어왔다. 마치 나를 조준하는 것 같아 본능적으로 바짝 엎드렸다. 기자 신분으로 여권을 받은 것도 아니니 자칫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무차별로 진격을 시작하던 군인들이 광장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호텔방에 내려와 뜬 눈으로 밤을 지샌 나는 날이 밝으면 밖으로 나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4일 아침, 카메라를 점퍼에 감추고 호텔을 나와 톈안먼 쪽으로 향하는데 숨막히는 긴장과 공포감으로 머리칼이 곤두섰다. 한걸음한걸음 발길을 옮기며 점퍼 사이로 현장을 기록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아찔하기만 하다. 베이징라디오 방송국 앞에 이르자 수십 명의 계엄군들이 시민들을 향해 총구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막상 내 앞에 겨눠진 총구를 바라보자 식은 땀이 흘러 일단 호텔로 되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불에 탄 장갑차와 거리를 몇 장 찍은 후 허기진 배를 빵으로 채우고는 지금까지 찍은 필름을 가방 깊숙한 곳과 옷에 분산시켰다. 사진기자는 현장을 기록한 필름 보관이 필수다. 아무리 좋은 장면을 촬영했어도 필름이 분실되거나 손상되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정신을 수습한 후 안내원을 설득해 다시 밖으로 나서 멀리서부터 차분히 현장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육교에 올라 망원렌즈를 통해 대치 상황을 찍으니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피를 흘리며 시민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좀 더 가까이 찍을 수만 있다면...' 품 속에 넣은 카메라를 광각으로 갈아 끼운 후 후다닥 셔터를 누르고는 뒤를 돌아보니 안내원이 보이질 않는다. 불안감이 밀려와 호텔로 돌아오는데 한 무리의 청년들이 동료의 시체를 메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이를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어올리니 군중들이 순식간에 나를 에워쌌다. 살벌한 눈빛을 보며 '어이쿠! 이제 죽었구나!' 하는 순간 "정선생, 죽지 않으려면 빨리 필름 뽑아주고 도망쳐야 합니다." 안내원의 목소리다. 이것 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필름을 쭉 뽑아주니 한 청년이 외쳤다. "꽈이치(빨리 가라)!" 목숨을 걸고 찍은 필름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일단 살고 봐야 했다.

호텔로 돌아오니 입구에 '창문을 내다보지 말 것' '사진을 절대 찍지 말 것' 등의 경고문이 나붙었다. 더 이상 사진 찍을 욕심을 낼 수는 없었고 앞서 찍은 필름을 중국 주재 일본인들이 철수할 때 서울에 보내는 걸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톈안먼 사태로 옌벤 재중동포 취재를 더 이상 진행 할 수가 없어 서울로 돌아오며 4ㆍ19혁명과 5ㆍ18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6ㆍ10 민주항쟁을 생각했다. 역사란 무엇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물음의 끝은 나는 사진기자이고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에 지금도 감사하며 살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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