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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특집/ 연 이야기 - 어릴 적 놀던 마음속의 그 연… 아이들과 다시 띄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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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특집/ 연 이야기 - 어릴 적 놀던 마음속의 그 연… 아이들과 다시 띄워 보세요

입력
2011.01.31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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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힘이 연실 당기는 힘과 맞선다. 그 팽팽한 맞버팀의 힘으로 연은 뜬다. 바람에 너무 맞서면 연은 치솟다 뒤집어지기도 하고, 좌우로 요동치다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 그럴 땐 연실을 풀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 힘을 빼면, 연은 맞버팀의 탄력을 잃고 시름시름 눕는다. 연실을 쥔 힘은 바람의 힘에 순응해야 한다. 그렇다고 시종 너무 순종하면, 그래서 떠오른 연의 너울이 너무 잔잔하면 연 띄우기는 싱거워진다. 때로는 지나치게 까분다 싶게 맞서기도 해야 연은 자신의 야성, 특유의 자유로움을 잃지 않는다. 요컨대 연 띄우기의 관건은, 연이 바람 길을 아슬아슬 따르되 아주 잃어버리지는 않게 인도하는 일이다. 그렇게 순응하고 또 조화하면서 연은 천천히 제 높이를 지닌다. 적당히 멀리, 높이 떠오른 뒤에야 연은 스스로 바람 길을 연다. 연은 그 때부터 비로소, 난다. 연 날리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연이 날기 시작하면 아이는 연 따라 멀어졌던 시선을 거두고 한껏 제쳐 굳은 목을 푼다. 곱을 대로 곱은 손도 입김으로 녹이고, 엉거주춤 언 고추를 꺼내 오래 참았던 오줌도 눈다. 손가락에 감각이 돌아오고 어지간히 관절이 풀리면 슬슬 연과 바람의 놀이에 개입할 때다. 연실을 힘차게 감아 연을 치솟게 했다가 튀김질(순간적으로 얼레를 연실과 일직선으로 세워 실을 풀어내는 일)로 파르르 풀어 바람 위에 연을 눕혀보기도 하고, 다시 균형을 잡아 좌우로 일렁이게 하면서 크고 작은 원호를 그리며 떠올려도 보고…, 슬쩍슬쩍 곁눈질도 해야 한다. 결전의 연 싸움 날(정월 대보름), 맞서야 할 또래 전사(戰士)들의 얼레질 솜씨가 얼마나 늘었는지 눈여겨봐둬야 하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수록 바람은 거칠어지고, 욕심껏 풀어놓은 연실을 감다 보면 덜 여문 팔은 금세 뻣뻣해진다. 하지만 그 즈음의 아이들에게 그 들판에, 그 언덕에, 그 강가나 갯벌 텅 빈 모래밭에 가장 늦게까지 버티며 연과 씨름했다는 사실만큼 뿌듯한 일은 없다. 아이들의 연날리기는 그래서 늦게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음력 섣달 보름달이 이울기 시작해서 정월 대보름 큰 달로 다시 부풀 때까지 아이들은 그렇게 연을 날렸다. 아이들, 이라고 했지만, 연날리기에 노소는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른들이 더 열성이었고, 이웃 마을과의 연 대회라도 예정돼 있을 때면 더했다. 빈 들판이 사라지고 높고 낮은 마을 언덕들이 깎여 그 자리에 수직의 건물이 들어서기 전, 그래서 바람 길을 마음껏 꺾임 없이 따라갈 수도 있고, 하늘을 욕심껏 품어 안을 수도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균형이 아름다운 기울기를 만든다

가을걷이가 끝나 들녘이 휑해지면 아이들은 어른들 꽁무니를 물고 다니며 성화를 부렸고, 어른들은 가전(家傳)의 기술과 멋을 한껏 부려 댓살을 다듬고 한지를 오렸다.

연은 다섯 가닥 댓살과 한지, 그리고 연실로 만든다. 대는 마디가 적고 곧고 바람 잘 드는 그늘에서 충분히 말린 것을 썼다. 연은 바람처럼 가벼워야 하는데 댓살에 수분이 많으면 아무래도 무겁고 탄력이 덜하기 때문이다. 마디를 가운데 오게 잘라 다듬되 강하고 질겨야 하는 머릿살은 제법 두툼해야 하고, 허릿살은 낭창낭창 가늘어야 한다. 연의 생명은 균형이다. 댓살 하나하나의 두께도 일정해야 하지만, 좌우 엇갈려 연을 지탱하는 두 장살의 무게도 같아야 한다. 보통 크기의 방패연(약 60X40㎝) 하나 무게가 15g 내외이니, 오직 손의 감각으로 ㎎단위의 정교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 서울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4호 노유상(107)씨의 차남이자 전수조인 노성도(54)씨는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웬만한 집안 어른들은 그 기술들을 어지간히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노씨는 "종이는 질긴 한지여야 하고, 실도 상백사(常白絲 조선 명주실) 당백사(唐白絲 중국 명주실)만한 게 없다"고, "화학사도 좋다지만 탄성이 커서 연을 민첩하게 놀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문제는 너나없이 빠듯한 살림에 명주실 한 꾸러미도 쉽게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는 것. 서민들은 주로 떡줄(무명실)을 썼다. 궁장 권무석 선생은 "어머니는 매년 농사 끝나면 한 해 바느질거리에 쓸 명주실을 물레로 자아 장농에 넣어두시곤 했는데, 그걸 몰래 연실로 썼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고 했다.

연실을 감고 풀며 연을 놀리는 데 쓰는 얼레(또는 자새)도 중요하다. 바람에 맞서 100m씩 나아간 연을 감아 당기는 일은 노역에 가깝고, 그 하중을 견디려면 얼레의 재질도 질긴 박달나무나 대추나무쯤은 돼야 한다. '선수'들은 주로 육모 팔모 얼레를 썼고, 아이들은 사모얼레나 '볼기짝얼레(납작얼레)'를 썼다.

싸움 연이 되려면 민어부레풀이나 밥풀에 사기나 유리를 빻아 버무린 뒤 연실에 입혀 서슬이 일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가미 먹인다'(혹은 '사구 먹인다')고 했다. 칼날처럼 연실을 벼리는 것이다.

연(방패연) 중앙에 내는 구멍은 '방구멍'이다. 맞바람의 저항을 줄이고 연 뒷면의 진공상태를 메워 연의 민첩성과 내구성을 도모한 장치인데, 방구멍 오린 종이에 색을 칠해 연 이마에 붙이면 전통 방패연의 대표격인 꼭지연이 된다. 실용의 경계 안에서 멋과 개성을 돋운 그 알뜰한 치장만으로도 연은 넉넉히 우아했다.

잊혀가는 여린 바람의 전령들

연 싸움은 단순하다. 연실의 서슬로 재게 미끄러지면서 상대 연줄을 베는 것이다. 하지만 찰나로 겨루는 싸움의 기술은 오랜 경험과 고도의 감각을 요한다. 바람의 세기와 방향, 연 머리의 기울기 등 변수에 따라 연이 서야 할 유리한 위치도 결정된다. 늘 위에 앉는다고 유리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바람을 타고 밑에서 감아 챌 수도 있고, 위에서 내려 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의 양쪽 귀와 방구멍 중심, 치맛살 중간 지점에서 이어낸 네 가닥의 방줄이 연실과 이어지는 3m 남짓 부분이 연실에서 가장 약한, 비무장 지대다. 선수들은 그 지점을 즐겨 공격하는데, 그러자면 먼 거리에서 연의 크기만 보고도 연실이 합(合)을 겨룰 지점을 가늠해낼 만큼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 바람 세기에 따라 방줄을 늘이거나 줄여 연의 민첩성과 안정성을 조절하고, 튀김질의 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한다. "아랫줄을 치맛살 아래로 맬수록 연의 움직임은 둔해지지만 힘이 강해지고, 위로 매면 파고드는 맛은 덜해도 동작이 빨라지죠. 그러니까 바람이 센 날은 아랫줄을 좀 길게 가고…."

조선 후기의 세시기(歲時記)에 따르면 연은 음력 섣달 들어 날리기 시작해서 정초부터 정월 대보름 사이에 성행했는데 정월 대보름이 지나 연을 날리면 '고리백정'이라고 욕을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식자들은 그만 놀고 봄 농사에 대비하라는 삶의 계율이자 절제의 미덕이라고 해석한다.

문헌들은 또 연날리기가 지닌 송액영복(送厄迎福)의 의미도 기록했다. 정월 대보름날 연줄을 끊어 연을 날려 보내는 '액막이 연'이 그것이다. 연에 연 주인의 이름과 생시, 또 '送舊迎新(송구영신)'따위의 글을 쓴 뒤 연실에 솜고치를 매달아 불씨를 묻혀 날렸다는 것이다. 실(사람의 힘)에서 풀려나 전적으로 바람과 하늘에 투신하는 그 순간의 연은 염원을 하늘에 전하는 전령이었고, 시각적으로 보자면 여느 전통 신앙의 전례 못지않게 효험 있어 보이는 기복의 형식이었을 것이다. 옛 사람들은 그렇게, 신분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각자의 번창과 건강의 기원을 소박한 연 위에 실어 올렸다.

하지만 이 풍속은 양반가 자제쯤 돼야 누릴 수 있던 호사였을지 모른다. 실도 종이도 귀한 시절이었고, 붓도 아무나 들던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민들의 연은 장롱 위에 누워 새로 다가올 섣달을 기다렸을 것이다. 요즘 한강 둔치의 간이매점에서 파는 비닐 가오리연이야 반나절살이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찾는 이가 드물게 된 지 오래. 연이 외면당하는 까닭은 여럿이겠지만, 그걸 보면 사라진 공간만 탓할 게 아닌 듯하다. 거기에는 15g짜리 연에 싣기에는 우리의 욕망이 너무 무겁고 번다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 꼭지연 반달연 치마연… 방패연 종류도 각양각색

한국민속사전편찬위원회가 간한 한국민속대사전 등에 따르면 한국 연에는 방패연과 가오리연, 창작연이 있다.

대표 연은 방패연이다. 방패연은 꼭지 모양과 색, 색과 형상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꼭지가 온전한 원이면 그냥 꼭지연, 반원이면 반달연, 꼭지 색이 먹색이면 먹꼭지연, 반원이 청색이면 쪽반달연인 식이다.

방구멍 중심에서 아래쪽으로 색을 입히면 치마를 입었다 하여 치마연, 색동을 입히면 색동치마연이 된다. 허리에 색이 들어가면 동이연, 꼭지만 비워두고 나머지를 칠하면 초연, 군데군데 점이나 눈(眼)을 박아 넣으면 박이연이 된다. 뿔처럼 위협적인 치장을 한 연은 대개 충무연이라 부르고, 아예 연 전체에 도깨비 문양을 새긴 도깨비 연도 있다.

싸움에 나서는 연은 치장 역시 가벼웠다. 색도 무게를 지니기 때문이다. 노성도씨는 "일반 물감을 한지에 칠하면 번지기 때문에 곱고 선명한 색을 입히려면 반드시 단청물감을 써야 합니다. 문제는 그게 비싸고 무겁다는 단점이 있어요." 그래서 싸움 연 중에는 꼭지 장식도 없이 글씨 표식만 한 것들도 있다. 관록의 싸움꾼인 노씨는 늘 붉은 반원만 단다. "떠오르는 태양의 형상이죠. 물론 싸움에서 질 때는 이우는 태양이 되지만요." 90년대 초ㆍ중반까지만 해도 크고 작은 전국 대회로 겨울 한 철이 꽤 바빴는데 근래에는 규모를 갖춘 대회는 2,3개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래도 대회가 있다 하면, 4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연쟁이'들이 못해도 100여 명은 늘 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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