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과학벨트) 입지 선정의 원점 재검토를 시사한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이 정치권에 만만치 않은 후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일각에선 벌써부터 제2의 세종시 논란을 떠올린다.
1일 신년 방송좌담회에서 나온 이 대통령의 발언은 그렇잖아도 미묘한 갈등 기류가 흐르던 정치권 내 과학벨트 입지를 둘러싼 전선에 기름을 부었다. 자유선진당을 비롯한 충청권의 거센 반발은 물론이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내에서도 충청권 유치냐, 아니냐를 놓고 지역별 감정싸움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어 과학벨트 입지 논란은 '정국 태풍의 핵'으로 부상하는 형국이다. 이회창 대표 등 선진당 소속 의원들은 6일 청와대를 항의 방문해 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규탄대회를 벌이기로 했다.
야권의 공약 파기 비판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아직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못한 채 곤혹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이 대통령의 발언을 "공약 백지화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선정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힌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정도가 현재로선 최선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미 벌집을 쑤신 마당에 꼭 꿀을 따려는 건 아니라는 해명이 온전히 먹힐지는 미지수다. 한나라당 대전시당 등은 곧 대통령이 과학벨트 충청권 유치 공약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을 모아 청와대에 전달키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과학벨트 유치에 나선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이 대통령의 발언에 "청신호가 켜졌다"며 반색하고 나서 여권 내 내홍이 부풀어오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고심 끝에 여권 일각에선 "과학벨트 추진위원회가 공정하게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충청도민에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이 대통령의 언급을 들어 넌지시 '유치 경쟁 후 충청권 선정' 수순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충청권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는 것은 불가피하고, 또 다른 논란을 부를 소지도 다분해 보여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과학벨트의 세종시 입지를 주장해 온 한나라당 정두언 최고위원은 트위터로 "과학벨트는 대통령께서 지난 대선 때 중부권에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교과부가 작년 1월 세종시가 최적지라고 발표했다"며 "대통령 약속대로, 정부 발표대로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자꾸 문제가 커지는지 답답하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일단 이번 사안을 대통령의 '공약 뒤집기'로 몰아붙이며 공세의 소재로 삼고 있다. "세종시 문제로 상처받은 충청권에 대한 약속을 또 다시 헌신짝처럼 내버렸다"(차영 대변인)며 충청권 민심을 한나라당으로부터 확실하게 격리시키는 기회로 삼겠다는 의도다.
그렇지만 민주당도 내부 사정이 간단치는 않다. 일찌감치 과학벨트 충청권 유치를 당론으로 정했지만 지난달 말 의원총회에서 호남권과 충청권 의원들이 정면 충돌하는 등 확실한 단일대오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당에 이 대통령의 발언은 호남권 의원들에게 당 바깥의 원군이 된 셈이다. 과학벨트 호남권 유치의 현실화 가능성이 다소 높아진 만큼 이들의 당내 투쟁 동력 역시 자연스럽게 올라갈 전망이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5일 기자간담회에서 "앞으로 많은 지방자치단체, 출신 지역 의원 간의 갈등이 예상된다"며 "대통령이 다시 한 번 공약집을 보시고 훌륭한 판단을 해주실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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