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경제학은 유량(流量 flow)과 저량(貯量 stock)을 구분한다. 유량은 일정 '기간'의 경제활동의 양이고, 저량은 어느 '시점'에서 본 양이다. 예컨대 국민총생산(GNP)이 유량이라면 국부(國富)는 저량이다. 이런 점에서 경제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의 도 용어에서 둘을 혼동했다. 제목은 저량인 국부지만, 내용은 유량인 국민총생산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시건전성 부담금'은 피상적
이 것은 지금 한국에서 그냥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현실에서 유량과 저량의 구분이 문제가 되고 있다. 다름 아닌 세계 금융위기 후 개혁 방안을 내는 과정에서 그렇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논의되어 온 개혁 방안은 유량에 대한 것과 저량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저량에 대한 대표적 방안은 '은행세'다. 은행이 차입금으로 과도한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 투자한 것이 금융위기를 불러왔고, 그런 방식으로 대형화해서 '대마불사' 식 도덕적 해이를 저질렀기 때문에, 은행의 부채에 과세하자는 것이다.
유량에 대한 대표적 방안은 '자본거래세'다. 단기자금 유출입이 너무 변덕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완화하기 위해 과세하자는 것이다. 특히 자국통화로 돈을 빌릴 수 없는 개도국은 급작스런 외자 유출로 외환 위기가 일어나곤 하기 때문에 그 필요성은 더욱 크다.
한국도 장고 끝에 금융위기 대처 방안을 내놓았다. 정부가 26일 국회에 제출한 외국환거래법 개정안의'거시건전성 부담금'이 그 것이다. 그 내용은 단기외채 잔고라는 저량에 부과하는 은행세다. 나아가 중장기 외채에도 좀 더 낮은 요율로 부담금을 부과하려 하고 있다. 거둔 돈은 외국환 평형기금에 구분 적립한다고 한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선 1997년과 2008년 두 차례 외환 위기가 모두 은행이 단기 외채를 졌던 것이 급격히 유출되면서 일어났기 때문에 은행의 외채를 겨냥한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 방안은 유량과 저량의 구분이라는 관점에서 보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은행이 부채로 규모를 키워 대마불사 식 행태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저량인 부채에 과세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 경우 외채뿐 아니라 모든 부채에 대해 과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경우 지금까지 추진해 온 은행의 대형화와는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아직 자국 통화로 돈을 빌릴 수 없는 개도국인 한국의 입장에서 외환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급격한 자본 유출입을 방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량에 대한 과세인 자본거래세를 부과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도 거시건전성 부담금은 자본거래세의 요소는 전혀 없는 것이다.
결국 거시건전성 부담금은 유량과 저량이라는 관점에서 분석적으로 따져보지 않고 피상적으로 생각한 결과로 보인다. 그냥 단기 외채가 빠져나간 것이 위기의 원인이었고, 그것을 들여 온 것이 은행이니 은행의 외채에 과세하자는 것은 아닌가.
경제원론에서 정답 찾기를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세는 단기 외채에만 해야 할 것이다. 중장기 외채는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 등이 한국 기업의 해외 플랜트 공사 등을 하면서 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대한 과세는 자금조달 비용을 올려서 한국 기업의 수주 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거시건전성 부담금으로 거둔 돈을 일반회계 세수에 넣는 것이 아니라 외국환 평형기금에 적립한다는 것도 문제다. 기금이 각 부처의 '주머니' 역할을 한다고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 아닌가.
거시건전성 부담금 문제는 유량과 저량의 구분이라는 경제원론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것 같다. 애덤 스미스 이후 230여 년 동안 이루어진 경제학 발전의 성과를 지금 한국이 활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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