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가 외면했던 재일동포 공격수 이충성(26ㆍ히로시마)이 일본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30일 오전(이하 한국시간) 도하의 칼리파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과 호주의 2011 카타르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이충성은 연장 후반 4분 그림 같은 왼발 발리슛으로 호주 골 네트를 갈랐다. 이충성이 터트린 천금의 결승골에 힘입은 일본은 1-0으로 승리, 2004년 중국 대회 이후 7년 만에 아시아 정상에 복귀했다. 네 번째로 아시아 정상을 밟은 일본은 최다 우승 기록도 아울러 세웠다.
이충성은 호주전에서 골을 작렬한 후 화살을 쏘는 시늉을 하는 독특한 세리머니를 펼쳐눈길을 끌었다. 국제무대에 서기 위해 국적을 바꿔야 했던 부담을 화살에 담아 쏘아 올린 듯 싶다.
리 다다나리라는 이름으로 일본 대표팀에서 활약하는 이충성은 재일동포 4세다. 일본에서는'자이니치(在日)'로 불린다. '자이니치' 축구 선수가 국제 무대에 서려면 한국과 북한, 일본 중 한 나라를 선택해야 한다. 지난 2000년 태극 마크를 단 박강조는 한국을 선택한 경우다. 정대세(보훔)와 안영학(가시와)은 북한을 조국으로 삼아 월드컵 무대에 섰다. 이충성은 일본을 택했다.'자이니치'가 일본 축구 대표팀에 뽑힌 최초의 사례다.
처음에는 태극 마크를 꿈꿨다. 그러나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충성은 조총련계인 조선 초등학교에서 축구와 연을 맺었고 도쿄 FC 유소년팀에서 성장해 2004년 J리그 1군에 입성했다. 비범한 재능은 한국 축구의 눈에 띄었다. 2004년 박성화 감독이 지휘한 청소년 대표팀(19세 이하) 소집 훈련에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에서 나고 자란 이충성은 팀에 녹아들 수 없었다.'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이충성은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당시 동료들에게 소외 당했던 아픈 기억을 눈물과 함께 쏟아냈다.
태극 마크를 달지 못한 그에게 일본은 귀화를 제안했다. 2007년의 일이다. 이충성은 고심 끝에 수락했고 2008 베이징 올림픽 본선 출전에 이어 A대표팀에도 선발됐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한국이 조국으로 자리하고 있다. 결승전이 끝난 후 "한국인, 일본인 이전에 나는 축구인"이라고 밝힌 소감에서 축구 선수로서 입신을 위해 국적을 변경한 그의 애틋한 심정이 드러난다. 일본으로 귀화했지만 여전히 한국식 이름을 고수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일본 이름 '리 다다나리'는 이충성(李忠誠)의 일본어 독음이다. J리그 정식 등록명도 'LEE CHUNSON'이다.
한편 카타르 아시안컵 MVP의 영예는 혼다 게이스케(CSKA 모스크바)에게 돌아갔고 한국은 페어 플레이상을 수상했다. 구자철(제주)은 5골 3도움으로 득점왕과 도움왕을 싹슬이했다.
김정민기자 goav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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