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 상금 3억원으로 세계 최대 기전인 비씨카드배 통합 예선에서 무더기 기권 사태가 발생, 대회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박진감 넘치는 명승부를 기대했던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지난 24일~26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3회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 통합 예선에서 대국자가 제 시간에 대국장에 나오지 않아 기권패 처리된 대국이 무려 29판이나 됐다. 이는 통합 예선 1, 2회전 194판 가운데 15%에 해당하는 것으로 다른 기전에 비해 엄청나게 높은 수치다.
기권자는 거의 다 한국 프로 기사. 중국 선수가 3명 포함됐지만 모두 비자 발급이 늦어져 불가피하게 대회에 출전치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반해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대국 시작 시간을 넘겨 기권패 처리됐다.
프로 기사가 대회에 기권하는 건 물론 본인의 자유지만 이처럼 무더기 기권이 늘어나면 대회의 격이 떨어지고 대진표 작성이나 대국실 배정 등 대회 운영에도 적잖은 차질을 빚게 된다. 실제로 이번 대회서도 대국실이 모자라 한국기원 2층 대회장과 4층 본선 대국실 뿐 아니라 평소 대국실로 사용하지 않는 5층 연구생실까지 징발해 사용하는 등 큰 불편을 겪었다. 만일 기권자들이 미리 불참 통보를 했더라면 훨씬 사정이 나아졌을 것이다.
사실 이 같은 무더기 기권 사태는 다른 기전과 달리 예선 대국료를 지급하지 않는 비씨카드배 출범 당시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여기에 한국기원의 구태의연한 대회 진행 방식과 일부 프로 기사들의 도덕적 해이 현상이 맞물려 상황이 악화됐다.
국내 프로 기전은 전통적으로 프로 기사들에게 대회 참가 신청을 받는 포지티브 방식이 아니라 소속 기사 전원이 출전한다고 가정하고 불참 통보를 별도로 받는 네거티브 방식을 채택해 왔다. 프로 기사가 일단 대회에 출전해 대국을 하면 이기든 지든 소정의 대국료를 지급하므로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거의 모든 기사가 대회에 출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기사들이나 기원 모두 네거티브 방식이 훨씬 편하고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2009년 창설된 비씨카드배가 본선 64강에 오르지 못한 선수에게는 일체 대국료를 지급하지 않기로 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64강에 오르려면 예선에서 2~3연승을 거둬야 하는데 그전에 탈락하면 괜히 고생만 하고 소득이 전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노장기사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불참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 대회에도 12명의 기사들이 사전에 기원에 불참 통보를 하고 통합예선에 나오지 않았다. 이는 이미 예상됐던 일이고 오히려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선 대국료 부담을 줄이고 좀더 박진감 있는 승부를 유도하려는 대회 취지에도 맞는다.
문제는 사전에 기원 사무국에 아무런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아 당연히 출전할 것으로 간주하고 힘들여 대진표를 만들고 대국실까지 배정했는데 대국 당일 무단 기권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
이는 일차적으로 프로 기사 개인의 건전한 상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지만 대회 방식이 달라졌는데도 과거와 똑같이 네거티브 방식을 답습한 기원에도 책임이 있다. 이번 경우에도 기권자의 상당수가 원래부터 비씨카드배에 출전할 뜻이 없었기 때문에 대회 일정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자신의 이름이 대진표에 올라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유야 여하튼 한국이 주최하는 간판급 세계 대회에서 기권패가 무더기로 나온다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앞으로 비씨카드배나 삼성화재배처럼 예선 대국료를 지급치 않는 기전만이라도 먼저 국내 기사들에게도 외국기사처럼 출전 신청을 받는 포지티브 방식으로 전환하고 무단 기권자에 대해서는 다음 대회 출전을 금지시키는 등 적절한 페널티를 매기는 방향으로 대회 운영방식이 개선되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박영철 객원기자 indra36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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