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태광 그룹 비자금 의혹 수사를 지휘해온 남기춘 서울서부지검장이 28일 돌연 사표를 제출하면서 사퇴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거대 재벌 그룹의 비리를 겨냥한 검찰 수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전장의 장수'가 스스로 물러나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자 각종 해석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검찰 내부의 여러 얘기를 종합하면 가장 직접적인 사퇴 배경은 이날 단행된 고검장급 인사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법무부가 청와대와 최근 고검장급 인사를 상의하는 과정에서 남 지검장의 교체도 유력하게 검토했고,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남 지검장이 먼저 사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법무부 일각에선 남 지검장과 대검 한 간부의 자리를 맞바꾸는 안이 구체적으로 거론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도 "일부 지검장 인사를 검토한 것은 사실이지만 최종적으론 고검장급 인사만 하기로 결론을 냈는데, 남 지검장이 먼저 거취를 결정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법무부와 청와대가 남 지검장을 대검 부장 자리로 옮기는, 사실상 '문책'성 인사 대상으로 검토한 것은 서부지검이 진행하고 있는 기업 수사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한화그룹 수사의 경우 20여 차례에 걸친 압수수색과 300여명의 관계자 소환조사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법원이 모조리 기각하면서 '먼지털기식 수사' 논란이 제기됐다.
평소 "한번 움켜쥔 목표물은 놓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잘 알려진 남 지검장 특유의 집요한 수사 스타일도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여론에 민감한 청와대와 법무부가 검찰 라인을 통해 서부지검에 여러 차례 경고 메시지를 보냈고, 그럼에도 수사 기조에 변화가 없자 결국 문책 인사를 검토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 지검장의 사퇴는 '수사 외압'이라는 측면에서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역으로 꼽혀온 재벌에 대한 수사 도중 지검장이 결과적으로 불명예 퇴진한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검찰 내부에선 남 지검장이 평소 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강골 검사'라는 평을 받아온 터라, 그의 갑작스러운 사퇴를 두고 "수사과정에서 발견된 범죄 혐의를 덮으란 말이냐"며 옹호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다.
청와대와 법무부가 '검찰 군기 잡기'를 하고 있다는 불만도 감지된다. 재경 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천하의 남기춘도 꺾이는데 이제 어느 누가 재벌을 수사할 수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와대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앤장이 두 그룹의 변호를 맡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인사의 배경을 짚는 시각도 있다.
남 지검장과 대검 수뇌부의 갈등설도 거론된다. 서부지검의 수사 방식이 "환부만 신속히 도려내는 수사"를 강조한 김준규 검찰총장의 뜻과 배치된다는 이유에서다. "강직하다 못해 고집불통이라는 얘기까지 들을 정도라 윗사람으로서는 다루기 힘든 스타일"(중수부장 출신 한 변호사)이라는 평소 남 지검장의 스타일도 불화설의 배경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서부지검이 중요 수사 국면 때마다 일일이 김 총장의 승인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오히려 김 총장은 "일선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남 지검장을 옹호해왔다고 대검 관계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남 지검장의 사퇴는 '검찰 대 권력'으로 전선이 확대되는 단초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남상욱기자 thot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