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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염치의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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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염치의 독서

입력
2011.01.2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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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쪽이 넘는 를 드디어 다 읽었다. 번역본 두 개를 놓고 번갈아 읽었으니 3,000쪽을 읽은 셈이다. 뿌듯함도 잠시, 박지원에 대한 궁금증이 부쩍 일어서 내친 김에 도 읽기로 했다. 같은 실학자라 해도 지난 세밑부터 읽고 있는 정약용의 정제된 문장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원래 옛 글 읽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작정하고 고전 읽기에 매달리는 이유는 독서회 때문이다. 몸담고 있는 독서회에서 우리 고전 읽기를 새해 계획으로 잡은 터라 선생 노릇하는 나는 마음이 바쁘다. 회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모임 전에 부지런히 읽어두어야 한다.

10년 넘게 해온 독서회지만 딱히 고전을 읽자고 내세운 적은 없었다. 그러다 지난 해 6개월 동안 버지니아 울프, 표트르 도스토예프스키, 프란츠 카프카 등 유명작가들의 대표작을 함께 읽었다. 독서회에서 인문서들을 꾸준히 읽어왔지만 그럼에도 짧은 시간에 매번 전혀 다른 문법의 책들을 읽고 토론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공연히 어려운 책을 읽자고 해서 안 그래도 많지 않은 회원들이 떨어져 나가면 어쩌나 걱정도 했다. 하지만 회원들은 어느 때보다 열심이었고 출석률도 오히려 높아졌다. 더구나 이제는 우리 고전까지 읽자고 나설 만큼 고전 읽기에 재미를 붙였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주부들이 대부분인 독서회에서 까다로운 인문서나 고전을 읽는 게 쉽지는 않다. 왜 이렇게 골치 아픈 책을 읽느냐고 항의를 듣기도 했다. 내 대답은, 읽기에 편한 책은 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읽기 쉽다는 것, 읽기에 편하다는 것은 내 마음에 거슬리는 내용이 없거나 내 머리에 이해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뜻한다. 즉, 내가 이미 아는 것, 내게 익숙한 것, 내가 믿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독서다. 이런 독서로는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모든 게 낯선 어린 시절엔 책에서도 사람에게서도 작은 풀벌레에게서도 깨우치고 배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 새롭게 배우는 일이 드물다. 아니, 배우기는커녕 가르치려고만 든다. 특히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이 세상의 진리인 양 아는 척을 하고 생색을 낸다. 다른 세상, 다른 경험, 다른 생각에 눈을 감으니 자신은 행복하지만 주위 사람은 죽을 맛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이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자신의 무지를 돌아보고 부끄러워하며, 섣부른 지식으로 다른 삶을 모욕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정약용처럼 밥 파는 노파에게서도 천지간의 진리를 배우는 열린 정신을 갖기 위해서다. 그런데 요즘은 열린 정신은 고사하고, 많이 배워서 성공한 사람들이 염치도 모르는 경우가 참 많다. 청렴한 몸가짐으로 주위를 살피는 염(廉)도, 자신의 무지와 모자람을 부끄러워하는 치(恥)도 없이, 툭하면 공치사요 툭하면 거짓말이다.

삼호주얼리호 구출작전의 성공으로 자랑이 늘어진 정부와, 전관예우를 당연시하고 탈세와 거짓말을 하고도 변명만 늘어놓는 고위층 인사들을 보니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박완서 작가의 는 소설이 떠오른다. 30여 년 전 유신 시절, 작가는 이 작품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지식을 깨우쳤다. 예의도 염치도 잊혀진 오늘, 아무래도 그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 독서인 이덕무는 "부끄러움을 안다면 무엇인들 이루지 못할까" 했으니, 책이든 삶이든 염치부터 챙기고 볼 일이다.

김이경 소설가·독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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