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의 지방선거에서 경기도로부터 시작된 무상급식 논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울시에서는 무상급식을 둘러싸고 시장과 의회가 극단적인 대립으로 파행을 겪고 있다. 한나라당의 대권 선두주자인 박근혜 의원이 복지정책을 제시한 것에 대응하여 민주당은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복지를 주장하고 한 걸음 나아가 대학생 반값 등록금 정책을 당론으로 내걸었다. 이른바 “3+1”복지정책이다. 이대로 가면 내년 총선과 대선은 복지논쟁이 선거판을 좌지우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대선ㆍ총선 표몰이 수단 되려나
복지정책 논쟁이 선거판의 쟁점이 되는 경우 다른 정책의제들은 모두 그 속에 함몰되어 버리는 블랙홀과 같은 무서운 흡인력을 갖게 된다. 이성적인 담론보다는 감성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복지정책은 한 번 방향을 잘못 잡으면 국가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으며, 궤도를 수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복지정책을 표몰이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정치권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복지논쟁이 대통령선거를 2년 가까이 남겨놓은 시점에 일찌감치 시작되어 아직 논의할 시간이 있다는 점이다. 복지정책의 철학과 기본방향에 대한 토론이 전면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복지논쟁은 정치권의 국지전에서 전 국민적인 전면전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무상논쟁을 넘어 제대로 된 한국의 복지정책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국민적인 담론을 형성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표를 얻기 위해 제시하는 무책임한 선심성 공약에 대해 면역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복지논쟁은 ‘선별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의 논쟁으로 요약되고 있다. 모든 국민에게 무상으로 급식을 제공하면 보편적 복지라는 것이고, 급식비를 지급하기 어려운 바람에게만 제공하면 선별적 복지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심각한 언어적인 왜곡이다.
돈 있고 능력 있는 자만이 급식 등 복지혜택을 누리도록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배제하자는 주장이 있다면 이를 선별적 복지론이라고 불러야 한다. 모든 사람이 굶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모두 보편적 복지론에 속하다고 볼 수 있다. 모두에게 무상으로 급식을 제공하느냐, 저소득층에게 무료로 급식을 제공하느냐의 문제는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는 방법상의 차이에 불과하다. 목적의 차이가 아니라 수단의 차이에 불과하다.
지금 정치권에서 부유한 자만이 복지혜택을 누리도록 하겠다는 주장은 없다.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점에서는 여당이건 야당이건 차이가 없다. 여야가 모두 같은 목적인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권에서 주장의 차이점은 국민 모두가 복지혜택을 누리게 하는 보편적인 복지라는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모두에게 무상복지를 할 것이냐, 아니면 능력 부족한 자에 한하여 무상급식을 제공할 것이냐 하는 수단상의 차이에 불과하다.
복지를 실현하는 수단인 무상의 범위를 목적인 복지수혜자의 범위에 대한 보편성 여부로 변질시켜 개념화한 ‘보편적 복지론’이나 ‘선별적 복지론’은 심각한 언어적인 오염으로 국민들의 보편적 사고를 가로막는다. 보편적 복지론의 개념적 오류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하는 이유는 언어의 왜곡이 정상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에 등장하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이 언어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언어정책으로 신어(新語)정책이다. 정치권에서 얘기하는 ‘보편적 복지론’과 ‘선별적 복지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혜택을 배제하는 것에 대한 찬반논쟁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정치권이 논쟁 주도하면 안돼
국민 모두에게 공짜로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지속 가능하고 국가 발전과 개인 발전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도록 하는 선순환적인 복지정책인지를 진지하게 논의하여야 한다.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서는 악마와도 기꺼이 손을 잡을 수 있는 정치집단이 복지논쟁을 주도하도록 맡겨둘 수는 없다. 복지정책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비용 부담자인 국민들이 중심을 잡고 복지정책의 방향을 잡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를 하고 정치인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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