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음향과 소란으로 가득 찬 채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환상의 그대’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의 대사를 인용하며 열린다. 인생에 대한 냉소로 가득할 이 영화의 내용을 미리 알리는 대사다.
미국의 괴짜 대가 우디 알렌(76) 감독의 마흔 번째 영화 ‘환상의 그대’는 행복이라는 이름의 욕망을 쫓다 허망한 현실과 마주치는 여덟 인물군상의 행태를 좇는다. 등장인물의 비루하고 졸렬하고 이기적인 행동이 우습고 쓸쓸하다.
알피(앤소니 홉킨스)는 수십 년 해로한 아내 헬레나(젬마 존스)를 버리고 딸 뻘의 3류배우 샤메인(루시 펀치)에게 새 장가를 간다. “인생이 덧없이 흘러가는 게 두려웠던” 그는 운동과 젊은 여성에 매달리며 회춘을 꿈꾼다. 버림 받은 헬레나는 점쟁이를 쫓아다니며 인생 역전을 노린다. 알피의 딸 샐리(나오미 와츠)는 직장 상사 그렉(안토니오 반데라스)에게 끌리고, 무명 소설가인 샐리의 남편 로이(조쉬 브롤린)는 아파트 맞은 편에 사는 디아(프리다 핀토)에게 한눈을 판다.
원제는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이다. 헬레나가 점쟁이로부터 남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흥분하자, 사위인 로이가 “키 크고 어두운 외모의 이방인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이죽거리는 대사에서 따온 제목이다.
원제는 별스럽지 않게 내뱉어진 말 같지만, 이 영화의 우울한 정서를 대변한다. ‘키 크고 어두운 외모의 이방인’은 풍문처럼 떠돌다 때가 되면 누구에게나 어김 없이 찾아 드는 죽음의 이미지를 풍긴다. 등장인물들은 아등바등 돈과 사랑이라는 행복의 조건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그들의 종착지는 죽음이다. 알렌 감독은 100년도 채 못 가는 인생의 부질없는 욕망을 그렇게 은유 해낸다.
돈에 눈이 멀어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동료의 소설을 훔쳤다가 들통이 나는 로이, 바라던 아들을 새 아내가 임신했으나 자신의 아이라는 확신이 없어 고뇌에 빠지는 알피, 그렉에게 잘 보이려 소개해준 화가 친구에게 그렉을 뺏기는 샐리의 현실 등 영화는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알렌이 바라보는 인생은 빛과 그림자의 연속이고, 행복과 불행이 앞 뒷면인 동전이나 다름없다.
등장인물들의 곤란한 처지가 웃음을 자아내지만 폭소로 이어지진 않는다. 세계적인 영화감독의 이력에 견주면 범작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알렌의 삶에 대한 시선을 쉬 거부할 수 없다. 전 아내의 양녀이자 서른 다섯 살이나 어린 여성과 황혼의 로맨스를 펼치는 자신의 상황을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영화에 투영한다. 역시 인생은 산 만큼, 행한 만큼 보이나 보다. 27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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