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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겨야 사는 개그맨들이 울고 있다… 너무 긴 코미디 암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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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겨야 사는 개그맨들이 울고 있다… 너무 긴 코미디 암흑기

입력
2011.01.26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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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따위 버린 지 오래죠. 어렵게 밟아온 과정을 다시 되풀이하는 게 씁쓸하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니까요.” 신인 개그맨 발굴 프로그램인 KBS2 ‘개그스타’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A(31)씨는 지난해 10월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폐지 때까지 무대에 섰던 어엿한 SBS 개그맨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 중인 정주리가 동기다.

지난 21일 KBS 별관 공개홀의 ‘개그스타’ 녹화장. 야구모자를 눌러쓴 A씨는 2층 방청석에 앉아 부러운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웃음이 터지는지 꼼꼼히 모니터하는 모습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며칠 전 대학로 개그극단 골방에서 봤을 때 “누가 유서라도 써야 하나. 개그맨들은 낙천적이라 죽지도 못한다”며 쓴웃음을 짓던 그였다.

코미디 암흑기가 너무 길다. 지상파TV 개그 프로그램이 줄줄이 축소ㆍ폐지되면서 대학로 공연무대까지 된서리를 맞았다. 무대를 잃은 개그맨들은 실업자 신세가 됐다. 얼굴이 알려진 일부는 행사 진행자로 빠졌고, 그마저도 할 수 없는 신인급은 하나 둘 떠나고 있다. SBS 개그맨 상당수가 소속된 개그전문 기획사 이엔티팩토리 관계자는 “120여명이던 소속 개그맨들이 웃찾사 폐지 후 썰물처럼 빠져나가 지금은 50명 정도 남았다”고 말했다.

SBS에선 웃찾사 종영과 더불어 코미디 프로그램이 사라졌다. MBC는 아이돌 그룹에 포커스를 맞춘 반쪽짜리 개그 프로그램 ‘개그쇼 난생처음’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지상파 3사 중 코미디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건 ‘개그콘서트’를 방송하는 KBS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난해 KBS 연예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김병만이 “MBC SBS 사장님들, 코미디에 투자해주십시오”라고 호소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MBC 연예대상을 받은 유재석도 “내년에는 더 많은 후배들과 함께 했으면 한다”며 씁쓸해 했다. 실제 MBC 코미디부문 상은 시트콤 ‘볼수록 애교만점’ 출연 탤런트들이 휩쓸었고, 신인상 후보에 개그맨들은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SBS는 아예 코미디 부문 상을 없앴다.

MBC는 공개 코미디 ‘하늘도 웃고 땅도 웃고 사람도 웃고’와 변형된 포맷의 코미디 프로그램 ‘꿀딴지’를 잇따라 폐지한 뒤 지난해 11월 신개념 개그쇼를 표방한 ‘난생처음’을 선보였다. 하지만 말이 개그쇼이지, 정형돈과 가수 호란, 길이 아이돌 그룹을 초대해 진행하는 형식으로 여느 예능과 다를 바 없다. 김경진 등 개그맨 몇 명이 나오지만, 방송가 은어로 ‘병풍’이라 불리는 비중 없는 역할에 그친다. 원만식 MBC 예능1부장은 “코미디가 아이돌 위주로 가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현재 방송 여건상 제작비와 공이 많이 드는 정통 코미디 부활은 어렵다”고 밝혔다. 정통 코미디를 하려면 개그맨 수십 명을 투입해야 해 출연료가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기존 코미디 프로그램이 잇따라 한자릿수 시청률로 참패하면서 손쉬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다.

‘난생처음’ 녹화가 있던 지난 14일 오전 MBC 코미디언실. 18기 개그맨 이지성(29) 등 세 명만 녹화 준비를 하고 있어 썰렁했다. 아이돌 가수를 받쳐주는 들러리 역할만 하다가 2009년 3월 뽑힌 막내기수들끼리 의기투합해 짠 코너의 첫 녹화 날이라 들뜬 모습이었다. 이들 동기였다가 KBS 공채에 다시 응시해 지금은 개그콘서트의 ‘두분토론’으로 인기몰이중인 김영희가 부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지성은 “나는 콩트에 강한 MBC 코미디가 맞다”며 “언젠가 기회만 되면 갈고 닦은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나 한창 개그를 짜야 할 개그맨들이 예능 보조출연자로 소비되는 현실에서, 그런 날은 요원해 보인다. 이지성은 22일 방송된 ‘무한도전’에서 정형돈을 따라다니며 개소리 스피커로 위협하는 스태프 역할로 등장했다.

SBS 쪽 사정은 더욱 열악하다. 2008년 SBS 공채로 뽑힌 B(28ㆍ여)씨는 “방송사에서 구내식당 밥 몇 번 공짜로 먹은 것 말고는 덕 본 게 없다”며 자신들은 그냥 방치돼있다고 했다. 최근 그는 ‘일요일이 좋다’에 출연했지만 일반인 출연자처럼 달랑 5만원짜리 상품권 한 장을 받았다. 그래도 열정을 버리지 못해 대학로 개그무대에 서며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는 “KBS 가서 마음껏 개그하는 이들이 가장 부럽다”고 말했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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