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노래한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라고. 그러나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리운 사랑”이라면, “흘러간 추억마다 그립던 사랑”이라면 과거는 물어야 한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은 흘러/ 끝없는 대지 위에 꽃이 피었”나니.
‘헤리티지 인더스트리’. 이른바 문화유산 산업의 핵심은 오늘 우리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꽃’의 어제를 되새겨보는 일이기도 하다. 과거가 다양하고 세월이 깊을수록 이야기도 무궁무진하다. 바로 영국으로 프랑스로 사람들이 가고 또 가는 이유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다시 파리에 올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도시의 엄청남이 꽃처럼 피어나는’(보들레르) 곳, ‘파리라는 대양을 탐사하는 사람들의 수가 아무리 많고 그들의 관심이 아무리 진지하다 해도, 그곳엔 언제나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 놀라운 것들이 기다리고 있’(발자끄)단다. 나이 탓일까, 회색의 날씨 탓일까. 연민과 우울이 도시를 떠돌았다. 남편의 삐딱한 표현마따나 ‘카메라를 메고 광분’하던 시절의 앵글 속에서는 잡히지 않았던 또 다른 모습의 파리가 도처에 있었다.
19세기 미술의 궁전 오르세이 미술관이 기차역이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현대 미술관 퐁피두센터가 ‘파리의 위장’이라 불리던 시장 자리에 섰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모네의 을 위한 맞춤 미술관 오랑주리는 튈레리 공원의 오렌지 재배 온실이었고, 맞은편의 사진 영상미술관 죄드폼은 테니스장이었다고 한다. 센 강변의 포도주 창고였던 베르시는 쇼핑가가 되었는가 하면, 음악의 산실 바스티유 오페라는 바로 프랑스 혁명의 함성이 도시를 울리던 곳이었다. 화려한 스펙터클이 감추고 있는 도시의 과거는 시장과 미술관, 감옥과 음악당 사이만큼이나 깊고 넓다.
그러나 역사는 스스로 노래하지 않는다. 발레리도 샤이오궁전에 새기지 않았던가. “내가 무덤이 되느냐 보물이 되느냐는 내 앞을 지나가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친구여 부디 욕구가 없이는 들어오지 말라”고. 황홀한 감각의 지층 아래 켜켜이 숨겨진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더 곡진하게 질문을 해야 한다. 파리라는 박물관의 지붕 밑에 종횡으로 서려 있는 사람들의 꿈과 일상, 그리고 혁명과 빵에 대해.
마침 허기를 채우기 위해 찾은 곳은 그랑 불바르의 레스토랑 샤르티에였다. 19세기 말, 이른바 ‘블루칼라’들에게 ‘주머니를 위협하지 않는 값’으로 따뜻한 밥 한 끼를 제공하던 노동자 식당이었다는 유래가 특히 인상적이다. 높은 천장에 큰 거울, 황동 선반들이 시원한 느낌을 주는 넓은 홀에, 성별과 직업, 나이를 불문하고 어깨를 부딪치며 식사를 하고 있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검은 조끼에 흰 앞치마를 두르고 식탁 사이를 날아다니는 숙련된 웨이터를 보는 일도 즐거웠지만, 무엇보다도 레스토랑이 된 노동자 식당은 지금도 누구의 주머니도 위협하지 않는 ‘착한 가격’이었다.
구르메의 도시 파리 한복판에 또 다른 역사를 만들고 있는 ‘노동자 식당’에서 연륜으로 치자면 비슷한 우리의 ‘함바(飯場)’를 상기한다. 일제 강점기의 상처 위에 다시 불거졌던 최근의 비리에 생각이 미치자 부러움을 넘어 슬프기까지 하다.
시대의 질곡을 안고 있는 우리의 함바가 마침내 명소로 거듭나는 것을 보는 일은 요원한 일일까? 삶이 초라한 시대일수록 문화에 대해 떠든다던가. 구호만 난무하는 ‘문화’나 ‘비전’이 아니라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에 대해 자랑스럽게 물어 볼 수 있는 ‘과거’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성혜영 박물관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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