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4> 뮤지컬 '천국의 눈물' 연습 현장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4> 뮤지컬 '천국의 눈물' 연습 현장

입력
2011.01.26 12:08
0 0

■ '즐거운 소통'

“이 장면에서는 하루를 더 살 수 있다는 즐거움과 환희의 감정을 일관되게 표현했으면 좋겠다” “베트콩의 주말공세를 앞둔 전쟁통의 파티다. 각 배역을 살려 복잡미묘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미국 음악감독과 한국 배우의 의견이 맞섰다. 연습실에는 순간 정적이 흐른다. 배우들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다시 격론이 오간다. 눈발 날리는 바깥 바람이 차갑다.

통역 끝에 서로의 의도를 조금 더 이해했다. 결론은 잠시 뒤로 미뤄졌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천국을 노래하는 하모니가 울려 퍼진다.

함께 서는 무대. 수많은 관중. 환호와 앵콜. 이들의 표정에는 늘 과정의 고통과 완성의 희열에 대한 환상이 공존했다. 태평양을 건너 서울에서 만난 한국 배우와 미국 스태프는 늘 그런 표정의 소통으로 벽을 넘어서고 있었다. 멋진 커튼콜을 향한 몸부림이다.

▦창작의 고통

24일 오전 서울 중구 예장동 남산창작센터 2층 연습실에서 열린 뮤지컬 ‘천국의 눈물’ 노래연습 장면이다. 다음달 1일 개막을 앞두고 두 달 째 연습중인 이들의 표정에는 설레임과 피로감이 겹쳤다. “베트남을 배경으로 운명을 넘어선 세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다룬 보편적 정서의 글로벌 뮤지컬”제작진이 목표로 삼은 극의 방향은 이것뿐이었다.

연습기간 동안 대본은 20번 수정됐고, 공연시간은 20분 줄었으며 장면도 27개에서 25개로2개 줄여 긴장감을 높였다. 미국 브로드웨이나 영국 웨스트엔드의 작품을 들여와 기존의 극과 연기에 최대한 가깝게 연습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부분 동양인의 감수성에 맞지 않는 표현을 바꾸는 작업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반응의 당위성을 놓고도 한국과 서구의 이해와 정서는 달랐다. 실제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그레이슨 대령은 극중에서 여주인공 린이 한국군 준을 따라 한국행을 택한 뒤 자결하는 것으로 내용이 바뀌었다. 한국 연출인 윤정환씨는 “모든 것을 바친 사랑이 떠나도 내 삶을 산다는 서양식 정서,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죽음도 택할 수 있다는 동양적 정서에서 미국 연출과 견해 차가 있었다”며 “하지만 초연되는 한국의 관객 정서를 고려해야 하며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장발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반응의 당위성은 세계 보편적이라는 설득도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24일 오후에도 여주인공 린 역을 맡은 윤공주(30)는 바뀐 대본에 맞춰 미국 뉴욕에서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 혼이 밤샘작업 끝에 보내준 노래 연습에 열심이었다. 윤씨는 “대본이 매일 매일 바뀌는 게 제일 힘들었다. 개막 2주 전인 오늘만 해도 대본이 바뀌었으니까”라고 말했다. 배우들은 대본이 바뀔 때마다 바뀐 대사와 노래를 외우고 대사, 동작 연습도 새로 해야 한다.

국적과 배경이 다른 사람들의 협업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있다. 미국 연출과 스텝들은 오전 10시 연습시작, 오후 6시 연출 노트(지시)시간을 매일 철저하게 지켰다. 대부분 저녁공연에 맞춰 점심 이후에나 연습을 시작해 밤늦게까지 연습을 계속하는 ‘저녁형 인간’인 국내 배우들은 생활리듬을 바꾸느라 애를 먹었다.

▦소통의 즐거움

22일 연습장은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왼편에서는 안무가가 배우들의 동선과 동작을 점검하고 있었고 오른편은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연습이 시작됐다. 미국 연출인 가브리엘 베리는 양쪽을 오가며 한국 음악감독ㆍ안무가와 협의를 반복했다. 통역이 따라붙었지만 언어로 채울 수 없는 뉘앙스의 차이가 존재했다.

가령 군인 역의 몸짓 하나도 서구의 정서는 우리와 달랐다. 목례하듯 그레이슨 대령에게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는 미군 사병 역할의 한규정(26)에게 감독은 계속 “고개를 숙이는 게 부자연스럽다”고 지적했다.

한씨는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미군 역할인데 생각해보니 고개를 숙이는 문화가 없는 미국인처럼 행동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됐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한국 배우와 스태프들이 미국 배우와 스태프의 정서를 받아들인 셈이다.

대본의 언어를 뛰어넘어 뉘앙스를 이해하고 노래와 춤 연기로 이를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작업이다. 연습이 진행됨에 따라 대본과 노래, 춤이 수시로 바뀌었지만 배우와 스태프들은 묵묵히 바뀐 노래와 안무에 맞춰 매일 연습을 반복했다. 정통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로 이번 한국초연 연습에 참여한 브래드 리틀은 정규 연습시간이 끝난 뒤에도 윤씨 등 상대배우들과 남아 손짓과 발짓을 써가며 대본연습을 했다.

소통의 즐거움은 이들이 창작의 고통과 언어의 장벽을 이겨내는 힘이다. 린 역의 이해리(26)는 “슬플 때 발걸음까지 슬플 필요는 없다”는 연출자의 지적을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슬픈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게 연기’라는 통념과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역과 보편적 사실에 대한 생각을 한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어떤 감정으로 걷는사람이든지 발짓에는 차이가 없었다. “발걸음이 슬플 필요는 없다”는 지시는 말로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의도와 뉘앙스를 읽는데서 극의 사실성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22일 오후 안무가 이란영씨도 샌프란시스코 장면을 놓고 골몰하고 있었다. 여주인공 린이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 춤추는 여자들의 모습과 선물꾸러미를 들고 구애하는 남성들의 군무가 이뤄지는 장면이다. 당초 이 장면은 남녀 배우 양쪽이 각각 똑같은 군무를 추도록 돼있었다. 하지만 베트남 출신의 여성이 처음 미국을 방문해 느낀 경쾌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는 부족하다는 게 안무가와 연출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연출자의 의도를 알면서도 춤과 동선을 어떻게 바꾸는 게 좋겠다는 뜻을 통역을 통해 전달하기는 어려웠다. 안무가는 각 캐릭터의 특성을 살려 바꾼 장면을 연출자에게 직접 보여줬고, 안무를 바꾸는 것이 더 낫겠다는 데 합의했다.

이씨는 “말로 협의해 본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서로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내 생각대로 해서 눈으로 보여주는 것 이상의 커뮤니케이션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들려주는 것으로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고 점점 더 완성시켜갔다. 24일 음악연습에서 애드리안 베럼 음악감독은 “ ‘아’ 나오는 부분에 호흡을 많이 섞어서 부드럽고 가볍게 불러주세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배우들이 통역된 그의 표현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곧 “야리리라 야라리, 야라라라라라랄리라”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제서야 배우들의 음정은 자신감을 찾은 듯 힘이 실렸다. 한국 음악감독인 한정림씨는 “말로는 서로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음악은 템포와 멜로디로 쉽게 이해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오후 6시께 연출자가 출연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벌이는 노트(지시)시간. 분위기는 엄숙했다. 연출자의 주문과 지적이 이어졌지만 배우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동의했다.

1대 1 대칭이 될 수 없는 언어의 특성은 통역을 통해 전달할 수 없는 뉘앙스의 차이를 낳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보여주기를 통해 확실하게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고 언어의 한계를 극복해가고 있었다.

▦“이제는 관객과의 소통”

25일 오후 배우들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섰다. LCD가 깔린 바닥은 객석을 향해 약간의 경사가 져 있었다. 평평한 무대에서 연습하던 배우들은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자전거 타는 신이 있는 배우들은 경사진 무대에 적응하려는 듯 부지런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지금까지 고생한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상상했던 극장에 실제 온 것이 가슴 설렙니다. 남은 일주일간 설레임과 흥분상태를 잘 지켜가되, 여러분의 이번 주 최대 목적은 안전이라는 것을 명심해주십시요.”

가브리엘 감독이 무대에 선 배우들을 독려했다. 외국 스태프와의 소통으로 창작의 고통을 이겨냈던 이들이 이제는 관객과의 소통을 시작할 때다. 배우들은 떨리는 듯 아쉬워 보였다.

린(커버) 역을 맡은 이진희(33)는 “무대가 너무 예쁘고 설렌다”며 “스태프들과의 소통도 즐거웠지만 관객과의 소통은 더 기대된다”고 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

■ 외국인 스태프, 한국 배우와 소통 해보니

“영어를 잘 못해도 눈빛만 보고 바로 실행하는 똑똑한 배우가 있더군요. 배역 그 자체가 되려는 진심은 감정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열쇠지요.”

뮤지컬 ‘천국의 눈물’의 감독인 가브리엘 베리가 두 달 동안 한국 배우들과 공연을 준비한 소감이다. 2000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The Wild Party’를 연출해 칼로웨이상 최고연출상을 수상한 그는 이번 공연에서 총감독으로 30여명의 한국인 배우, 60여명의 한국인 스태프와 끊임 없이 교감하고 소통했다.

가브리엘 감독은 ‘연기하지 마세요’란 지시를 하기도 한다. 배역 그 자체가 되려는 진심으로 감정 연기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언어의 차이도 이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배역) 그 사람이 되고 삶을 바라보는 생각하는 자세가 언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음악으로 소통하며 이번 공연을 준비한 애드리안 배럼도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공연 연습장에서 늘 ‘라라라라~’를 연발했던 그는 “공연 준비에서 의견 대립은 창조적 결과물의 자양분”이라며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언어를 뛰어넘어 더 좋은 예술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 언어로 대화한다는 무대 디자이너도 마찬가지였다. 2006년 ‘The Drowsy Chaperone’으로 토니상을 수상한 데이비드 갈로는 ‘천국의 눈물’무대를 디자인했다. 그는 한국인 스태프와 일한 소감에 대해 “아시아인과 작업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우리는 늘 사진이나 드로잉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언어로 인한 장벽이 거의 없다”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은 브로드웨이 공연장 평균 크기보다 2배는 크지만 프로젝션과 그림자를 잘 이용해 동양적 정서를 무대에 표현하려는 시도가 성공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작곡자로 유명한 프랭크 와일드 혼과 함께 연습이 바뀔 때마다 대본과 작사를 바꿨던 피비 황, 로빈 러너는 “한국 배우, 스태프는 서로를 매우 존중하고 팀웍이 좋을 뿐 아니라 유머러스하다”며 “한국어는 아름다운 언어일 뿐 아니라 소리로 들을 때 더 감동적이고 마음에 와 닿아 오히려 작업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김청환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