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집안 사정으로 이른바, 좌우익의 갈등을 호되게 겪었다. 좌파의 아들로서 여간 혼난 게 아니다.
해방 직후부터 시작해서는 6ㆍ25 전쟁이 끝나기까지, 남한 안에서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무리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옥신각신하고 있던 게 좌우익 갈등이다. 그 당시 온 나라 안이 좌와 우로 갈려져서는 서로 대결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남로당 당원이었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그 즈음에 이미 그랬던 모양이다. 그 당시로 자유진영에서 일컫는 대로 하면 우리 부친은 '빨갱이'였던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은 아버지가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터지고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우리 아버지가 왜 남로당에 가입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는지, 그 무렵의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일정 시대 부산의 번화가에서, 점원들을 몇 사람이나 데리고는 큰 가게를 운영한 분이다. 그래서는 동생들을 일본의 대학에 유학시킨 분이다. 상식적으로는 공산주의자가 될 분이 아니었다.
부친은 취미도 호화판이었다. 엔진보트를 사들여서는 먼 바다 낚시를 다니기도 했다. 낚아 온 생선을 손수 회를 쳐서는 식구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어린 아들과 딸을 유치원에 다니게 한 분이다. 내가 꼬맹이 시절, 부산 서부지역에 유치원은 단 하나뿐이었다.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좌익의 말버릇대로 하자면, '부르주아' 집안이 아니고는 언감생심이었다. 집안 사정으로는 좌익이 될 분은 아니었다. 남로당 당원이 된 부친은 북한 가까운 곳에 있는 소위 아지트의 책임자였다고 한다. 진작 월북해서는 북한에서 활동을 하다가 남파되었다고 했다. '알짜빨갱이'였던 셈이다.
수사 당국에 들통이 나고 붙잡히자, 파장은 온 가족에게 미쳐 왔다. 세 분 숙부들이 일단 체포되어서 조사를 받았다. 직접 연루됐다는 혐의를 벗게 되면서 다들 무죄로 풀려나긴 했지만 당시로는 여간 큰 변을 당한 게 아니다.
고등학교 2 학년이던 나마저도 경찰에 불려갔다. 반나절이 넘게 조사를 받고는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경찰이 그렇게 무서운 곳이란 것을 처음으로 똑똑히 실감할 수 있었다. 빨갱이 아들로서 날벼락을 맞았다.
한데 한참 뒤에 경찰에 다시 불려갔다. 체포된 부친이 강원도의 고성에서 탈출했다고 했다. 보나마나 다시 또 월북했을 테지만 일단은 가족을 조사한다고 했다. 그런 다음으로는 잠잠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과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도 그랬다.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 지방 국립대학의 교수가 되고 하는 데에도 아무 말썽이 없었다.
모르긴 해도 이때까지만 해도 소위 '연좌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집안에 좌익이 있으면 그 가족이 공공기관에 취직할 때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것을 연좌제라고 했다. 죄를 저지른 당사자의 온 가족이 형벌을 받는 것은 조선조 시대에 이미 연좌라고 했다.
하지만 그걸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서강대학 전임 교수가 되고도 한참 만에 당시 치안국 특정과라고 하는 기관에 불려갔다. 남대문 근처의 골목 안 구석진 곳이었다.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 호되게 조사를 받았다. 최근에 부친과 무슨 연락이 있었으면 대라고 했다. 부친이 최근에 강원도 북녘의 아지트에 들렸다가 다시 월북한 행적이 잡혔다고 했다. 가족끼리 연락이 없었을 턱이 없지 않느냐면서 불호령을 했다.
이렇듯 우리 집안은 풍파가 잘 날이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용케도 서강대학 전임 교수직은 그대로 지켜졌다. 북한에서라면 소위 반동의 아들이 대학 교수를 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임을 생각하면, 나는 그 당시 우리 정부의 은덕을 입은 셈이다. 그것도 자유주의 국가, 민주국가의 보람이라고 나는 고마워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서강대학에 재직한 지도 20 년이 넘게 되었다. 그런 중에 모교인 서울대학에서 나를 데려가고자 했다. 전임 자리가 바뀌게 된 것이다. 재직 중인 서강대학에 사의를 표명했다. 학교 당국에서는 극구 말리고 들었다. 미국인 신부인 총장과 교무처장이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교무처장은 나더러 서강대학을 사랑하느냐고 했다. 내가 물론이라고 하자, 그가 다그치듯 말했다. "그러고도 다른 대학으로 옮겨 가다니요."
그런 상황에서 아주 친한 교수 한 사람이 나를 보자고 했다. 학생처장 직을 맡고 있던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 절대로 이 학교 그만두지 못해."
왜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소상하게 사유를 일러 주었다. 경찰에서 나 때문에 학교 당국자를 찾아 왔다고 하였다. 나의 학교 안에서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심지어 우리 부친과 관련된 연좌제를 내세우면서 내게서 사표 받으라고 강요했다는 것이다. 한두 번 그런 게 아니라고 했다. 끈질기게 그랬었다는 것이다.
한데도 미국인 신부인 총장과 교무처장은 경찰의 요구를 거부했다고 한다. 나와 우리 아버지 사이의 일은 한 집안의 사생활이라는 것을 내세우더라는 것이다. 더욱이 문제 된 나 자신은 절대로 공산주의에 물들 사람이 아님을 확신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런 기막힌 사연을 들려준 친구 교수는 육중하게 말했다. "그런데 어딜 딴 대학으로 가겠다는 거냐? 그건 배은망덕이야."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경찰과 말썽을 빚으면서도 내게는 눈치도 보인 적이 없는 학교 당국자의 배려가 내 가슴을 쳤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총장과 교무처장을 찾아가서는 사과했다. 그 동안 학교 당국이 그렇게 크게 나를 지켜준 것을 모르고 있었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기도 했다. 그리고는 나는 '서강인'이 되었고 지금도 명예교수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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