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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숙증 아동 급증/ "아니 벌써" 말 못할 고민에 소녀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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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숙증 아동 급증/ "아니 벌써" 말 못할 고민에 소녀가 운다

입력
2011.01.25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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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조숙증 아이의 일상

“조금만 더. 997, 998, 999, 1,000!”

구령을 외치던 엄마 입에서 “천“ 소리가 나자 이를 악문 서연(8ㆍ가명)이가 줄넘기를 내팽개치며 놀이터 바닥에 주저앉는다. 호흡은 거칠고, 이마에선 소나기처럼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혹한의 칼바람에 감기라도 들까 어머니 조씨(37)는 급히 서연이의 모자 속으로 수건을 넣어 땀을 닦아준다.

“잘했어, 우리 딸.” 엄마가 등을 쓸어주며 칭찬해도 얼굴의 오기가 풀리지 않던 서연이가 잠시 후 숨을 고르며 묻는다. “엄마, 나 일주일 내내 천 번씩 했으니까 생리 안 하겠지?”

여덟살 소녀의 외로운 비밀

서연이가 처음으로 가슴이 아프다고 한 건 2년 전, 여섯 살 때였다. 설마 이차성징일거라고는생각도 못하고, 조씨는 서연이와 함께 대학병원 심장내과를 찾았다. 온갖 검사를 다 해봤지만 의사는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 통증을 호소했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부터 누가 봐도 확연하게 서연이의 가슴이 커졌다. 다시 병원을 찾으니 성조숙증인 것 같다며 1박2일 입원 검사를 권했다. 수도 없이 피를 뽑았고, 뇌나 난소 등에 종양이 있을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자기공명영상(MRI) 검사까지 했다. 결과는 여성호르몬 과다 분비에 의한 성조숙증이었다.

“그때부터 1년간 한 달에 한번씩 병원에 가 성호르몬 억제제를 맞았어요. 의사 말이 주사는 보조적 수단이고, 살 길은 운동뿐이래요. 처음엔 하기 싫다는 애를 다그쳤는데, 저도 절박한지 이제는 군말 없이 스스로 알아서 해요.”

아이에게는 본인의 신체적 상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싫었기 때문에 입단속을 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아이는 알아듣는 것도 같고, 못 알아듣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서연이는 이제껏 친한 친구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얘기한 적이 없다. 시냇물처럼 재잘거리는 여덟 살 소녀에게 비밀이란 얼마나 심사 외로운 일이었을까. 엄마는 입단속을 시킬 때마다 마음이 짠하다.

“초경 파티? 초경은 사망선고”

지난 20일 오후 성장클리닉을 운영 중인 서울 서초구의 한 한의원. 방학을 맞아 두배 가까이 늘어난 환자로 북적이는 이곳은 초등학교 4학년 빛나(10ㆍ가명)가 3년 전부터 주기적으로 찾는 곳이다. 여성호르몬 수치를 체크하고, 그 수치에 따라 한약을 짓는다. 일곱 살 때 가슴이 나오고 머리에서 비릿한 냄새가 나 병원을 찾기 시작한 빛나는 당시 성조숙증 때문에 1~2년 내에 초경을 할 것같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았다. 체중 관리, 음식 조절, 규칙적 운동…. 그때부터 빛나에게는 삶의 모든 것이 관리와 조절의 대상이 돼버렸다.

“먹으면 안 되는 게 너무 많아요. 계란후라이 너무 먹고 싶은데….” 여성호르몬을 자극하는 알류, 어패류 등은 절대 금식이다 보니 빛나는 학교 급식 먹기가 특히 힘들다. “어떤 날엔 계란 빼고, 콩장 빼고, 새우볶음 빼고 나면 먹을 게 없어요. 그럴 땐 맨밥에 김치만 먹고 와요.” 그 결과 통통한 편이던 빛나는 지금 키 140㎝에 35.7㎏으로 또래 평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성조숙증 아이들이 가장 무서워 하는 건 초경. ‘적어도’ 167㎝는 되고 싶다고 말하는 빛나에게 키 성장이 멈추는 초경은 파티하며 축하할 일이 아니라 ‘사망선고’나 다름 없다.

“지금까지는 잘 버텨왔는데, 호르몬 검사 결과 올해 생리가 시작될 수도 있다고 해서 다시 걱정이에요.” 어머니 이모(40)씨 말에 빛나가 소곤거린다. “1년만 있으면 그래도 정상인데…. 엄마, 1년 있다 하면 괜찮은 거지? 그치?”

초경을 시작하면 어린 게 뒷처리는 어떻게 할까, 쉬는 시간마다 엄마가 따라다니며 챙겨줘야 할 텐데, 다른 애들이 놀리기라도 하면 그 스트레스는 어떻게 견딜까, 이씨는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빛나는 몸 때문에 아이들이 나를 싫어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많다고 했다. 수시로 “엄마, 나 친구들이랑 초경 같이 시작하고 싶어. 나만 먼저 하는 거 싫어” 하며 심란해 한다. 치료비가 어떤 달에는 70만원 가까이 들지만, 그런 빛나를 보며 엄마는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다.

“그냥 방치했을 경우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여성성을 숨기느라 위축되면, 자기 몸을 혐오하게 되면, 이 작은 키로 평생을 살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해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어요. 뭐를 잘못 먹였나, 뭐를 잘못해줬나, 다 엄마 탓인 것만 같고…. 누구나 넘는 성장의 문턱인데, 왜 우리에게만 이리 길고 험한 걸까요.”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 원인 규명 안됐지만… 비만 환경호르몬 탓 추정

성조숙증의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영양 과잉으로 인한 비만과 환경호르몬이라고 불리는 ‘내분비계 교란 물질’을 ‘생체시계 교란’의 주원인으로 추정할 뿐이다.

성조숙증은 ‘이례적으로 이른 나이’를 제외하면 정상적인 사춘기 발달과 동일한 과정으로 진행된다. 드물게 중추신경계 종양이나 뇌 손상, 기형 등으로 인해 성조숙증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과도한 성호르몬 분비로 인한 증상이 대부분이다. 성별로는 남자 아이들보다 여자 아이들에게서 압도적으로 많이 발생한다.

비만아들의 사춘기 발달이 빠른 현상은 세계적으로 공통적이다.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이 우리나라 만 7~13세 여아 3,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소아 및 청소년의 성성숙 시기, 성조숙 실태 및 관련 인자 연구’ 용역보고서(2009)에 따르면 성조숙증 아이들은 정상군에 비해 체격이 월등하게 크고 골 연령도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비만으로 체지방률이 높아지면, 체지방에서 분비되는 렙틴이라는 호르몬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렙틴은 시상하부에 작용해 성선자극호르몬 분비를 촉진하며, 부신에서 안드로겐 효소를 자극해 성호르몬 분비를 증가시킨다.

최근 우리나라의 급격한 성조숙증 증가는 패스트푸드와 가공식품이 아이들의 주식이 된 식생활 패턴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 평가원 연구에서도 패스트푸드나 우유, 시리얼 등을 주로 먹는 아이들에 비해 한국 전통식 식사를 하는 아이들이 성조숙증 위험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식이 지방 섭취량이 낮고 식이섬유소 섭취량이 높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성조숙증은 마른 아이들에게서도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성조숙증의 원인이 비만뿐 아니라 환경호르몬과 성적 자극에의 노출, 스트레스 등으로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환경호르몬은 체내 내분비계를 교란해 마치 호르몬처럼 작용하는데, 화장품, 조제약, 플라스틱, 살충제 등에 흔히 쓰이는 화학물질들이 대표적이다. 종이컵이나 캔, 젖병 등의 안쪽에 코팅제로 사용되는 비스페놀A(BPA), 프탈레이트 등은 체내에 들어왔을 때 여성호르몬처럼 작용해 여아 성조숙증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추론된다.

TV 인터넷 등을 통해 너무 이른 시기부터 성적 자극에 노출되는 것도 성조숙증 증가의 원인 중 하나. 과도한 시청각적 자극은 아이의 뇌신경을 건드려 호르몬 분비에 영향을 주며, 성 성숙의 진행 속도를 완화하는 멜라민 생성을 억제한다. 가정 불화나 성적 부진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호르몬을 자극해 사춘기를 앞당길 수 있다. 이는 인체가 본능적으로 생존 위협이나 위험 요소를 감지하면 일찍 성장을 완료해 생식능력을 갖추도록 프로그래밍돼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박선영기자

■ 식이요법·운동이 중요 月수십만원 치료비 부담

성조숙증 치료로 양방에서는 주로 주사제를 통한 호르몬 조절 요법을, 한방에서는 약제 처방과 식이요법을 권한다.

양방 치료는 성호르몬 억제제 주사가 핵심. 중추성 성조숙증 환자는 4주에 한 번씩 '성호르몬 자극 방출 호르몬 유도체'(GnRH agonist)를 주사해 사춘기 진행을 막는다. 치료 과정에서 아이가 1년에 4㎝ 이하로 성장하면 성장호르몬 주사 치료도 병행한다. 부모들은 호르몬 치료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하지만 성호르몬 억제제와 성장 호르몬제는 세계적으로 부작용이 거의 없어 비교적 안전한 약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성호르몬 억제제는 한번에 20만~25만원, 성장호르몬 주사제는 체중 30㎏ 아이를 기준으로 1년에 800만~1,000만원 가량이 들 정도로 고가여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한방에서는 성호르몬 분비를 억제하는 것으로 알려진 율무, 인진호 등을 처방해 치료한다. 이런 치료는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이어지는 데 병원과 환자 증상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략 매월 40만~60만원의 치료비를 각오해야 한다. 뇌종양, 뇌하수체 이상 등 질병 때문에 발생하는 성조숙증은 한방에서 치료 할 수 없다.

가장 좋은 치료는 식이요법과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수면, 스트레스 해소다. 비만이 성조숙증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만큼 아이가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되 살이 찌지 않도록 식단을 짜야 한다. 패스트푸드나 인스턴트 식품은 피해야 한다. 환경호르몬이나 성호르몬 분비를 촉진하는 일회용 스티로폼 용기, 종이컵 사용도 좋지 않다. 소고기나 닭고기는 성장 촉진제나 호르몬 제제가 든 사료를 먹지 않고 자란 것을 골라야 한다. 화장품, 헤어 제품, 성인용 건강식품도 아이들에겐 해롭다.

강희경 기자 k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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