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오늘 우리 곁을 아주 떠난다. 그의 빈 자리로 혹한의 겨울바람이 더욱 시리다. 언제나 소녀 같은 수줍음,'나'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함, 늘 낮은 곳을 향한 가슴으로 삶을 오롯이 문학에 담고, 실천한 그의 존재가 너무나 따뜻했기 때문이리라. 많은 사람들이 타계를 애도하고, 그의 소설을 다시 펼치는 것도 그 따뜻함과 친밀감을 새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일 것이다.
박완서에게 문학은 절박함의 산물이었다. 그의 가슴을 짓눌러온, 너무나 단단한 응어리여서 20년이란 세월로도 풀어지지 않은 어린 시절 전쟁과 가난이 남긴 상처와 이별, 눈물과 절망. 누군가에게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미칠 것 같았다. 그에게 소설은 삶의 솔직한 고백이었다.
40세 늦깎이로 등단하면서 선보인 부터 그랬다. 전쟁으로 오빠를 잃고 생계를 위해 미군 PX에서 일하는 주인공 이경은 작가 자신이었다. 에서 서울에 삶의 말뚝을 박으려 발버둥치는 엄마는 그의 엄마였고, 청소년들에게까지 '박완서'를 만나게 해준 에서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는'나'역시 박완서 자신이었다.
그래서 어느 문학평론가는 "경험을 가지고 소설을 쓴 마지막 세대"라고 했다. 꾸며낸 이야기나 상상이 아니기에 그의 소설에서는 시대와 역사도 의식이나 상념에 머물지 않고 일상에 질펀히 녹아 든다. 그리고 가족의 죽음 앞에서는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섬세하게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소설과 삶을 우리와 더욱 가깝게 해 위안을 준 그는 이 시대의 열정적인 이야기꾼이었다. 이승을 떠나면서까지 "가난한 문인들 부의금 받지 말라"고 당부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는 거목이기보다는 나목(裸木)이기를 원했다. 그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면서도 한결같이 겸손해 했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아차산 자락의 조용한 마을에 자리잡은 집에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소설이라는 새싹을 피워내곤 했다. 그 나목이 있었기에 우리의 겨울은 정말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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