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쯤 여의도 금융가를 떠나 강원도 산골로 귀농한 선배의 이야기다. 서울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그 선배는 식탁 위에 놓인 큼지막한 고추를 가리키며 "우리는 이런 거 안 먹는다"고 했다. 싱싱하고 먹음직스럽게 보였지만 그 고추를 어떻게 길렀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몇 년 뒤에는 충청도로 귀농한 분을 만났다. 논농사와 밭농사가 힘에 겨운 인텔리 출신들이 나무 농사에 뛰어들어 묘목 값이 크게 떨어졌을 때였다. 그 분은 사과나무에 한 해 농약을 몇 번이나 치는지 아느냐면서 사과 농사꾼이 자기가 재배한 사과를 먹을 것 같으냐고 되물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며칠간 식당에 가거나 사과를 볼 때면 찜찜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구제역 파동의 와중에 그 때 이야기가 다시 생각난 것은 소와 돼지도 그 생명의 소중함을 논하기에 앞서 사람에게는 고추나 사과처럼 우선은 먹을거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국의 대책은 구제역에 걸린 소와 돼지 수백만 마리를 땅에 파묻고, 보상금을 지급하고, 백신을 접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구제역이 창궐한 것은 소, 돼지, 닭 같은 가축을 공장식으로 사육한 데 근본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구제역 바이러스야 옛날부터 있었던 것인데, 고기를 좀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많은 소, 돼지, 닭을 좁은 우리에 가둬 놓고 기르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면역력이 약해져 바이러스에 걸리기 쉽고, 일단 걸리면 무더기로 감염된다는 것이다.
사실 요즘 고기는 공산품처럼 공장에서 제조된다고 보면 된다. 이 공장에서는 소나 돼지, 닭이 빨리 자라 고기를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도록 고농도의 사료와 항생제 등의 약품이 투여된다. 소나 돼지, 닭 공장은 도시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 일반인들의 눈에 띄지 않으니 그 제조과정을 직접 본 사람은 별로 없다.
중학생인 딸아이는 돼지를 본 적이 딱 한 번 있다. 동물원에서였다. 소와 닭을 본 횟수는 그보다 좀 더 되는데 다 합쳐봐야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딸아이는 사람이 먹기 위해 소나 돼지, 닭을 잡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소, 돼지, 닭고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다른 집 아이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한때 미국 유명 담배회사 필립모리스사의 사장(물론 지금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겠지만)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소식이 인구에 회자됐다. 미국 식품의약청(FDA)도 모르는 담배 성분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내에서도 잘 팔리고 있는 미국의 한 아이스크림회사 상속자는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으면 어떤 피해가 오는지를 알고 나서 양심에 가책을 느껴 회사를 상속받는 것을 포기했다는 내용의 책이 국내에 소개된 적도 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먹을거리가 자연에서 어떻게 만들어져 어떤 과정을 거쳐 입으로 들어와 몸의 일부가 되는지 알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 100일이 지나면 부모로부터 받은 혈액이 아이의 입으로 섭취한 것에서 만들어진 혈액으로 바뀐다고 해 백일잔치를 했다. 그런데 요즘은 매일 먹는 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남경욱 문화부차장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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