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은 제법 화려했다. 데뷔작 ‘여자, 정혜’로 2005년 베를린국제영화제 넷팩상 등을 수상했다. 이어지는 영화 이력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두 번째 작품 ‘러브 토크’(2005)는 평단의 호의적인 평가를 얻었다. ‘아주 특별한 손님’으로 2007년 프랑스 도빌국제영화제 비평가상을 받았고, ‘멋진 하루’로 2009년 백상예술대상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6년 동안 4편 정도의 영화를 만들었으니 행복한 감독 축에 속한다. ‘여자, 정혜’로 배우 김지수의 매력을 재발견했고, ‘아주 특별한 손님’은 배우 한효주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충무로에선 ‘배우를 살리는 감독’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래도 재능에 값하는 대우를 받지 못하는 감독이라는 안타까운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흥행과는 인연이 없었고, 재미 없는 예술영화만 만드는 감독이라는 선입견은 견고해져만 갔다. 전도연과 하정우라는 호화 캐스팅 때문에 부러움을 샀던 ‘멋진 하루’조차 시장의 냉대를 받았다.
급기야 2009년 하정우와 수애가 호흡을 맞춘 멜로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촬영이 한참 진행됐는데도 제작 중단됐다. 스타 배우와 함께 만들던 영화가 제작비 조달 문제로 ‘엎어졌으니’(영화 제작 포기에 대한 충무로 속어) 마음의 상처가 클 만도 했다. “저러다 다신 메가폰을 들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기의 시간은 의외로 빨리,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찾아왔다. 차기작 ‘스캔들2’를 준비하며 남는 시간에 워밍업하는 기분으로 작은 영화를 찍으면서다. 주연배우 현빈의 드라마 출연 일정 때문에 영어제목만 지은 채 지난해 10월 급하게 촬영에 들어갔다. 사운드 작업도 채 이뤄지지 않았는데 베를린영화제로부터 “영화를 당장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영화를 완성해 베를린영화제에 보냈고, 2월24일 개봉을 확정 지으며 최근에서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한글 이름을 얻었다. 곧이어 베를린 경쟁부문 진출이라는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불운에 불운을 거듭하던 이윤기 감독에겐 생애 오래도록 기억될 순간이었을 것이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영어제목은 ‘Come rain, Come Shine’이다. ‘비가 오든 햇살이 비추든’이란 뜻이다. 이 감독은 지난 20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제작 보고회에서 “영화제에 초청된 것 자체만으로 행복하다. 상은 보너스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상을 못 받는다고 영화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라고도 밝혔다. 변덕스런 삶의 날씨 속에서 꿋꿋이 영화를 만들어 온 그의 말이기에 더 큰 울림을 줬다. 상을 받든 받지 못하든 그는 이미 박수 받을 만하다. 그래도 또 한 번 큰 기대를 해본다. 베를린에서의 낭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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