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와 주간한국, 일간스포츠를 오가는 동안 내 직급은 늘 널뛰듯 했다. 부장이라는 직책보다는 현장을 뛰는 것을 좋아한 때문이다. 부장 발령을 내면 회사를 떠나겠다는 엄포(?)가 받아들여져 후배 부장 밑에서 잠시 차장을 맡은 적도 있고, 또 어느 때는 부장대우로 발령받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일보에 몸 담았던 이름난 기자들과 동행 취재를 할 기회가 많았다. 2010년 '제10회 통영시 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언론인 김성우는 경남 통영의 보석 같은 섬 중의 하나인 욕지도 출신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일보에서 44년간 근무하며 파리특파원, 편집국장, 주필, 상임고문을 역임하며 칼럼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다. 나와 김성우기자는 이순신 탄신 400주년을 맞아 부산에서 목포까지 바닷길을 배를 타고 가며 취재한 적도 있었고 대선이 있었던 1967년엔 '표밭 나그네'를 함께 취재하기도 했다.
김성우는 돈에는 초연한 사람이라 함께 출장을 가게 되면 출장비를 아예 내게 맡겨버렸고 기사를 쓸 때면 꼭 맥주를 마시곤 했다. 나와 동행하는 걸 좋아해 사진부장이 혹여 다른 기자를 배정하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서 결국 내가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성우는 기사도 잘 썼지만 매너 좋고 자존심 강하고 술 좋아하고 그림도 좋아하는 팔방미인이었다. 음식에 있어서도 최고를 고집해 출장 중에도 항상 가장 맛있는 집을 찾아 끼니를 해결해야만 했다.
'표밭 나그네' 취재를 하다 광주에 도착했는데 꽤 늦은 시간이었다. 적당히 저녁 먹고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데 역시 김성우는 달랐다. 다짜고짜 택시를 잡더니 "광주에서 최고로 음식 잘하는 곳으로 갑시다" 하는 것이 아닌가. 택시 기사가 차를 댄 곳은 '수정'이라는 간판이 걸린 한정식 전문 음식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미모의 여주인이 반갑게 나서다 손님이 몇 없자 정색을 하며 물었다. "일행이 몇 분이세요?" "두 사람이요. 보다시피." "어머, 죄송해요. 저희는 차리는 게 많아 세 분 이상 되셔야만 상을 낸답니다."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세 사람 상을 주시오. 마담도 함께 먹읍시다." 3인분을 시켰더니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진수성찬이 들어왔다. 예나 지금이나 전라도 지역의 음식은 맛깔스럽기로 소문이 났는데 그 때만큼 푸짐한 상을 본 적이 없다.
불고기로 유명한 전남 광양 취재 때는 음식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구수한 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놋 화로에 석쇠를 갖다 놓고 양념바가지에 고기를 무쳐 굽기 시작하는데 육질이 너무 좋아 씹을 겨를도 없이 입 안에서 녹아버렸다. "배 즙에 고기를 쟀다"고 하는 주인의 말에 김성우는 "서울서 왔는데 집에 가서 구워 먹을 테니 석쇠 하나만 팔라"고 주인을 설득해 기어코 구리 석쇠를 하나 구입하기도 했다.
후에 고기를 사서 잘 구워먹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항상 최고를 좋아하는 김성우였지만 '표밭 나그네' 취재 도중 느낀 그는 서민들의 애환과 아픔을 아는 기자였다. 명예시인이자 명예배우이며 명문으로 손꼽히는 수필집 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한국일보에서 퇴임한 후 2005년 고향 욕지도 동항리에 '돌아가는 배' 문학관을 세워 귀향을 했다. 작은 음악회와 영화상영 및 연극 공연, 시 낭송회 등을 통해 고향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그와의 오랜 인연에 감사하며 건강하길 바란다.
일간스포츠에 근무할 때는 한국일보에 있다가 건너 온 이성부기자와 많은 취재를 다녔다. 기자보다는 등의 시집을 낸 유명한 시인으로 더 알려진 이성부와는 갖가지 기획 취재를 같이 하며 전국 팔도에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명산 명찰' '숨은 예인' '유배지' 등이 그와 같이 한 연작 취재물이다. 취재 여정을 따라 동고동락하니 마치 친형제처럼 서로 이심전심이 되었다.
시인 이성부는 신문기자로 일하며 취재를 하는 중에도 간혹 시를 한 수씩 짓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나도 덩달아 공자 앞에 문자 쓰는 격으로 어려운 말 한 구절씩을 읊조리곤 했다. 그럴 때면 이성부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아따 이게 뭔 소리여. 누가 시인인지 모르겄네" 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축구 광에 조기축구 회원이기도 했던 그는 실력이 웬만한 선수 수준이었고 후에 등산에 취미를 붙이더니 "산이 아니면 내가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살겠냐"며 오지와 산간을 찾아 다녔다.
전라도 광주 출신인 그가 산에 매달리게 된 연유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한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다가 산행을 통해 당시의 슬픔과 분노를 녹여낸 때문이라 생각된다. 어느 날 이성부와 함께 경북 풍기에서 취재를 마치고 인근 여관에 들른 적이 있다. 같이 한 잔 하기는 이른 시간이라 우선 목욕을 하기 위해 더운 물을 틀었는데 갑자기 뜨거운 물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오른 손에 그만 화상을 입고 병원을 찾아 응급처치를 하고 들어오니 혼자라도 한 잔 하고 오겠다던 이성부가 헐레벌떡 숙소로 들어왔다. "아니 왜 벌써 들어왔어?" "아이고, 놀랄 일이 생겨 그냥 들어 왔습니다." "무슨 일인데?" "한 잔 하려고 술을 시켰더니 왠 여자가 함께 마시자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 여자 손이 솥뚜껑만큼 커서 갑자기 정선배 생각이 꿀떡 같습디다. 어디 저 혼자 술 마실 수 있나요? 하하." 정도 많고 재주도 많던 시인이자 기자였던 이성부. 먼저 언급한 김성우기자와 함께 한국일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좋은 동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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