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음악만으로 평균적인 수준의 삶의 질을 누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중략) 그러려면 많은 걸 포기하면서 살아야 한다. 구질구질하게 사는 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지난해 11월 서른 일곱의 나이로 요절한 원맨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은 유고집 <행운아> 에 그렇게 썼다. 행운아>
한음파 밴드의 베이시스트 장혁조(35)씨는 그 구질구질한 삶에 지쳐 한때 꿈을 접었다. 넥타이 매고 무역회사에 다닌 지 3년째인 2007년 여름, 옛 정에 끌려 들른 달빛요정의 공연에서 그는 애써 묻어뒀던 그 꿈을 되살렸다. "아, 이 사람은 정말 어떤 상황에서든 음악을 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연 끝나고 형이 그러더군요. '자기가 제일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해. 너한테는 그게 음악이잖아.'" 그 길로 다시 기타를 잡은 그는 밴드 활동 틈틈이 달빛요정의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했다.
자신의 골방에 앉아 혼자 작사, 작곡, 편곡, 녹음 등을 다해 스스로를 '가내수공업 뮤지션'으로 불렀던 이진원은 둥지이자 일터인 그 골방에서 지난해 11월 1일 뇌경색으로 쓰러진 채 발견됐다. 장씨는 "소식 듣고 병원에 갔는데 뇌압을 낮추는 수술을 받느라 응급실에 들어가는 모습만 봤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며 모자를 쓸어 내렸다. 이진원은 닷새 후 하늘로 갔다.
그 후 장씨는 '언제쯤 사시미가 될 수 있을까'('스끼다시 내 인생' 중에서) 한탄하면서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언제나 날 지켜주고 있어 나는 행운아'('행운아')라고 노래했던 고인의 삶과 음악을 기리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유족을 도와 유품들을 정리하고, 생전 에세이집으로 기획됐다 졸지에 유고집이 되고 만 <행운아> (북하우스)를 주변에 나눠주는 일 등이다. 27일 오후 7시 홍익대 앞에서 '나는 행운아'라는 간판을 걸고 열리는 달빛요정 추모공연에도 참여한다. 인디밴드 102개 팀이 참여, 홍대앞 26개 클럽에서 동시에 열리는 이 공연은 홍대 인디밴드 역사상 최대 규모. 그는 "큰 공연이라고 해도 30~40개 팀이 참여하는 게 보통"이라며 "국내에 알려진 거의 모든 팀이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행운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2003년 데뷔 후 '절룩거리네' '스끼다시 내 인생' 등으로 이름을 알렸다. 가내수공업으로 낸 1집 앨범 'Infield fly'가 입소문을 타 2004년 음반사와 정식계약을 맺고 재발매 되면서 인기를 누렸지만, 2집 이후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급기야 2008년 3집 '굿바이 알루미늄'을 내며 "연봉 1,200만원, 월 수입 100만원이 되지 않으면 음악 활동을 접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1집 내느라 진 빚조차 다 갚지 못하고 떠난 달빛요정의 삶을 왜 많은 이들이 기억하려는 걸까. 장씨는 "그의 음악 안에는 가난한 인디 뮤지션의 처절한 현실이 담겨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녹아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음악에서 자신의 처지를 발견하고 또 위로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가 떠나고 난 후에야 그 빈자리를 커다랗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지난 3일 추모공연에 힘을 보탤 자원활동가 70여명을 모집했는데 무려 300여명이 몰렸다. 한 지원자는 "그의 죽음을 계기로 달빛요정이 남긴 음악과 인디밴드의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역사의 현장이 될 공연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고 했다. 공연 기획ㆍ진행을 맡은 컴퍼니에프 강진원 팀장은 "클럽과 인디밴드, 자원활동가 모두 돈 한 푼 받지 않고 이번 공연을 위해 나서줬다"며 "한 뮤지션의 안타까운 죽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추모공연이 그동안 제각기 살 길을 찾던 인디음악계가 굳건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도 있다. 강 팀장은 "이번 공연은 자발적으로 모인 인디밴드들이 인디계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뜻을 모으는 하나의 장이 될 것"이라며 "달빛요정은 비록 떠났지만, 그가 사랑했던 인디음악은 그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 이뤄낼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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