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 춘천으로 밤 따러 오셨더라고. 밤톨 주우면서 어찌나 즐거워하시는지. 그때만 해도 막국수, 빈대떡에 소주를 세 잔이나 자셨는데 이리 급히 가실 줄이야…"(소설가 전상국)
지난 22일 별세한 소설가 박완서씨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는 24일에도 후배 문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수인사를 나누는 문인들의 목소리에는 어머니를 여읜 듯한 아쉬움과 후덕했던 고인과의 추억이 겹쳐 있었다. 박씨와는 면부지였을 것 같은 어린 문인들이 한참을 기다렸다 국화 송이를 놓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전상국씨는 고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소박하면서도 여운 깊은 감동은 "너무나 진솔한 삶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전했다. "자기의 아픔을 자연스럽게 풀어낸다는 거, 그게 제일 어려운 거야. 선생님은 남들이 다 감추는 것도 솔직하게 내보이셨어. 삶을 누구보다 투철하게 관조하셨던 거지."
소설가 구효서씨는 실향에 대한 고인의 아픔을 들려줬다. "선생님 고향이 황해도 개풍이잖아요. 남한에서 개풍이 가장 잘 보이는 데가 제 고향인 강화도에요. 북쪽 땅이 보이는 연미정에 선생님을 모시고 몇 번 갔습니다. 호박김치, 민물게장 이런 강화 음식을 좋아하셨는데 이게 사실 황해도 음식이에요. 같은 작품에 보면 '~시다, ~시까' 같은 종결어미가 나와요. 강화 지역 사투리로 알려졌지만 사실 개풍 지역 방언이에요. 억양이 제 어머니랑 같아서 늘 가깝게 느꼈는데…"
시인 손택수씨는 어머니의 채근에 급히 빈소를 찾았다고 했다. "어제 고향(부산)에 있는데 어머니가 그러는 거에요. '니 빨리 안 올라가고 뭐하노?' 이 양반이 선생님의 책을 읽어봤을 리도 없는데…" 손씨는 "'까막눈 어머니'도 친근함을 느낄 만큼 고인의 작품 속 정서는 한국인에게 보편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갈등의 시대에 선생님은 가장 바람직한 의미에서의 중용, 곧 모든 이에게 연민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휴머니즘이죠. 그래서 해석되는 작가가 아니라 사랑 받는 작가가 되신 거겠죠."
권영민 서울대 국문과 교수(월간 문학사상 주간)는 "선생님만큼 꼼꼼한 분은 없었다"고 추억했다. "이상문학상 심사를 몇 번 같이 했는데, 보통 심사위원들은 관심 있는 작품들만 읽고 와 얘기해요. 그런데 박완서 선생은 10여 편 후보작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꼼꼼히 읽고 오셨어요. 후배들의 작품을 소중히 여기셨다는 증거죠." 문학평론가인 오창은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도 "선생님은 '70년대 작가' '80년대 작가'라는 식으로 호명되지 않는, 평생 작업을 쉬지 않은 귀한 형태의 작가"라고 기렸다.
2007년 가 출간됐을 때 고인의 낭독회를 연출했던 극작가 최창근씨는 "선생님의 육성에는 관객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선생님은 그때 김현승의 시 '눈물'을 낭송했어요. 낭랑한 목소리로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하고 읽으시는데, 정말 선생님의 삶과 어울리는 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극하는 사람이 이렇게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어떡하느냐'고 격려해 주셨는데…" 고인은 25일 오전 용인 천주교묘지에서 영면에 든다.
고인에 금관문화훈장 추서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고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이 대통령은 임태희 대통령실장을 통해 전달한 애도 메시지에서 "고 박완서 선생은 전쟁과 분단, 가난과 급격한 사회변화로 이어진 현대사의 삶의 조건을 따뜻하게 보듬어 우리 문학사에 독보적 경지를 구축했다"고 말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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