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영산(靈山)이며 청(淸) 나라를 세운 만주족과 국경을 맞대고 선 백두산은 민족들의 성산(聖山)으로, 1712년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기까지는 접근이 어려운 성역이었다.
만주(滿洲) 땅에 청나라가 서고 백두산을 경계로 정하는 국경 회담이 열리면서, 이 해에 청나라 오랄 총독(墺剌總督) 목극등(穆克登)과 함께 조선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의 수역(首譯)이 된 김지남(金指南)의 아들 경문(慶文)이 역관으로 백두산에 올랐다. 그 기행문은 아버지의 과 중복되지 않도록 홍세태(洪世泰)에게 부탁하여 쓴 로 조선 사람들의 백두산 기행문의 선편이다.
근대에 들어서는 톨스토이와 같은 시대의 러시아 작가로 백두산에 올랐던 가린 미하일브로스키(1852~1906)의 이 전하고, 1898년에 이 산 정상에 오른 감동을 이렇게 전해 주었다.
"저기 거대한 곰이 그 큰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누워 있다. 그리고 저 바위 위에는 환영처럼 신비로고 유연한 여인의 조상(彫像)이 서 있다. 그 여인은 한 손을 바위 가장자리에 기대고, 호수가 있는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여인은 연민과 의혹과 흥분에 싸여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듯했다.
이렇듯 이 신비로운 지구의 한 구석에는 아직도 완전히 창조되지 않은 세계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 호수의 밑바닥에서 위로 향해 구름이 일고 있었다.… 순간 부드럽고 하얀 구름은 사화산(死火山) 위로 높이 떠올라 기괴한 뱀처럼 이상야릇한 형태로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 그것은 영락없는 용(龍)의 승천이었다.(김학수 역)"
또 1926년에 오른 육당 최남선의 는 명문으로 이름났지만, 특히 세계적 위관(偉觀)인 를 보며 백두산에 오른 감상이 마음을 끈다.
"그러나 삼지의 미(美)는 삼지만의 홑겹 미가 아니라 일면으로는 백두산 이하 간백(間白),
소백(小白), 포태(胞胎), 장군(將軍) 등 7,000~8,000 척의 준극(峻極)한 산악들이 멀리서 위요하고, 일면에서는 천리 천평(千里天坪)이라고 하는 대야심림(大野深林)이 끝없이 터져 나가서, 웅박호장(雄博豪壯)의 갖은 요소를 보였으니, 이러한 외곽을 얻어서 삼지의 미는 다시 기천백 등의 가치를 더하며, 그리하여 문무겸전(文武兼全) 강유쌍계(剛柔雙濟) 이 일대 승경은 다른 아무데서도 볼 수 없는 천하 독특의 지위를 얻었다. … 어쩌다가 한 번 생긴 것이요, 어쩌다 한 군데 생긴 것인 만큼 그 신기하고 소중함이 여간일 수 없다."
이런 백두산을 못 가 본 지 오래다. 나는 두만강을 지나 한 번, 압록강을 지나 한 번을 백두에 올랐지만, 모두 남의 땅에 돈을 뿌리며 주마간산(走馬看山), "백두산미(美)의 클라이막스"라는 삼지연(三池淵)을 통해서 올라야 할 일인데, 량강도 삼지연군이 된 이 땅은 백두산 동남으로 40킬로의 명승구(名勝區), 육당의 말처럼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발보한(일부러 드러내 보이는) 삼지연을 거쳐 백두산을 오르는 여정은 북남이 상생하는 통일의 지름길일 것을….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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