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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 별세/ 폭력의 기억 지독한 내면의 상처, 모성적 삶과 문학으로 보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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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 별세/ 폭력의 기억 지독한 내면의 상처, 모성적 삶과 문학으로 보듬어

입력
2011.01.23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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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2010) 중) "마음 속에 나를 억압하는 찌꺼기가 없어져서 못 쓰는 거라면 그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 결국은 가벼워지기 위해 썼다는 게 가장 맞는 말이 될 것이다."(한국일보 기고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2002) 중)

한국 문단의 어머니였던 소설가 박완서씨의 삶과 문학을 관통하는 무엇을 꼽으라면 저 구절 속에 녹아있을 듯하다. 스무 살 때 겪은 6ㆍ25전쟁의 참혹했던 경험, 그 상처를 '복수'가 아니라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보듬어 안은 그의 글에서, 상처받은 뭇 영혼들도 제 이야기를 듣는 듯 스스로를 달래고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타계 후에야 딸 통해 심사결과 전해

1970년 늦깎이로 등단해 지난해 7월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를 펴내기까지, 거의 매년 책을 낸 '영원한 현역'이었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가 떠난 22일은 문예지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상 최종심사 날이었다. 1월 초 심사위원인 그에게 후보작 15편을 보냈던 염현숙 문학동네 편집국장은 "몸이 편찮으시면 심사를 안 하셔도 된다고 전했는데, 며칠 전 '원고 다 읽었다'는 연락이 왔다"며 "타계 후에야 따님을 통해 심사결과를 받고는 선생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젊은 문인들과 함께 했다는 생각에 뭉클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담낭암 진단과 함께 수술을 받았으나 경과가 좋았기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타계였다. 지난 17일 선생의 댁을 찾았던 소설가 이경자씨도 "항암 치료를 받고 계셨지만 눈빛이 맑고 초롱초롱했다. 어서 완쾌해 맛있는 것도 먹고 여행도 다니고 싶다고 하셨는데…"라고 말했다. 22일 새벽 갑작스런 호흡곤란으로 그는 마지막 말도 남기지 못했다.

6·25 전쟁이 남긴 뿌리 깊은 상처

"살면서 얻은 느낌으로 글을 썼던" 그는 자신의 경험을 문학으로 승화했던 세대의 대표주자였다. 그가 문학하고자 했던 이유이자 그의 글 바탕을 이루는 원체험은 6ㆍ25전쟁이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에서 조부모의 손에 자랐던 그는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한 1950년 동란을 맞았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그의 가족은 '빨갱이로도 몰리고 반동으로도 몰리는' 이념 갈등에 휘말리고, 의용군으로 나간 오빠가 세상을 뜨는 등 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었다. "6ㆍ25는 내 기억의 원점이다" "6ㆍ25가 없었다면 내가 글을 썼을까" 등 여러 자리에서 그는 전쟁이 트라우마임을 밝혔다.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삼은 등단작 <나목(裸木)> (1970)을 비롯해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1983)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2002) 등 많은 작품들이 자전적 요소를 지렛대 삼아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다뤘다.

치유로서의 모성적 사랑

그 상처 속에서 그를 붙들어 매준 것은 가족의 사랑이었다. 유년기 조부모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사랑, 1953년 결혼 후 그 자신 어미로서 다섯 자녀를 키우며 화목한 가정을 꾸렸던 경험은 그의 모성적 문학의 원류였다. "난 악인을 그리는데 능숙하질 못해요. 혈육에 대한 사랑, 그 때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결국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됐던 것 같아요."('문학의 문학'2010년 봄호). 마흔에 뒤늦게 등단한 것도 아이를 키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70~80년대 <휘청거리는 오후> (1977) 등 비열하고 폭력적인 중산층 남성의 이기적인 욕망과 허위의식을 꼬집은 세태소설과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1989) 등 억압받는 여성의 삶을 다룬 소설들도 이 모성애가 바탕이었다. "나더러 페미니즘 작가라는 사람도 있던데 페미니즘은 읽어봐도 모른다"던 말처럼, 그의 문학은 '이즘'이 아니라 삶에서 우러나왔다.

1988년 남편에 이어 서울대 의대생이었던 아들을 잃은 참척(慘慽)의 슬픔은 그의 삶을 다시 뒤흔들었다. '왜 내게 이런 일이'라는 분노와 신을 향한 원망으로 술에 파묻히기도 했던 그는 가톨릭에 귀의해 슬픔을 이겨냈고, '당신이라고 이런 일이 없겠는가'라는 보편적 상처에 대한 사유로 이어져 그의 글은 더욱 원숙해졌다.

좌우를 아울렀던 삶

이념 대립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그는 그 갈등을 회피하지 않고 문단의 좌우를 아울렀다. 1980년대 권위주의 정권과 맞서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그는 대표적 보수 문인인 소설가 이문열을 옹호해 일각에선 보수로도 몰렸다. 그는 문단의 왼편에 선 실천문학사가 어려워지자 "문학의 비판성을 회복하기 위해선 실천문학이 바로 서야 한다"며 <아주 오래된 농담> (2000) 등 2권을 실천문학사에서 내기도 했다. 그가 싫어한 것은 정치적 패거리주의, 그 밑에 깔린 거짓과 허위의식이었다. 실천문학사 주간인 손택수 시인은 "선생의 포용과 중용엔 상처 받은 이들에 대한 연민의 정신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세상살이의 폭력성은 끝나지 않았건만 그의 글은 이제 멈췄다. 남은 자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는 마지막 책 제목처럼 더 이상 억압의 찌꺼기로 글을 쓸 필요가 없는, 가보지 못한 더 아름다운 곳을 향해 떠났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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