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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추모 5주기…대한민국 비디오아트 기술자 1호 이정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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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추모 5주기…대한민국 비디오아트 기술자 1호 이정성씨

입력
2011.01.23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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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가 좋았고, 상상 속의 기계를 직접 만들었고, 멋진 작품이 됐고, 사람들이 열광했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한 평생을 TV 개조에 바친 한 기술자의 고백이다. 그가 뜯어고친 수 천대의 TV 수상기는 세계적인 비디오아트 거장 백남준의 작품이 됐다. 1988년 국내에 처음 전시된 ‘다다익선’(多多益善)을 시작으로 ‘전자 초고속도로: 미국대륙’ ‘메가트론’(1995) 등 적게는 80대, 많게는 1,000여대의 TV 수상기가 들어간 백남준의 작품 수십 여 점이 그의 손을 거쳤다. 공이 크니 작품명에 이름 한 자라도 넣지 그랬냐는 질문에 이 겸손한 기술자는 “그저 어르신(백남준)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만든 것일 뿐인데…”라며 손사래를 쳤다.

백남준(1932~2006) 5주기를 열흘 앞둔 19일 그의 비디오작품 제작을 도왔던 TV기술자 이정성(67) 아트마스터 대표를 서울 공항동 작업장에서 만났다. 작업장에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6~10인치 브라운관 TV 20여대와 컴퓨터, 전선, 어댑터, 배터리 등 각종 부품들이 가득했다. 이씨는 한 귀퉁이에 놓인 나무상자를 일러 “보물상자”라고 했다.

길게 누운 상자를 열자 백남준의 흔적들이 쏟아졌다. 독일 뒤셀도르프,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등 세계 곳곳에서 열렸던 백남준의 전시회 포스터들과 사진들, 백남준이 작품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즉석에서 메모하고 스케치한 카페 테이블보나 종이조각, 캔버스 등.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것도 수두룩하다. 이씨는 “파리 몽파르나스의 한 카페에 앉아 함께 차를 마시다가 선생님이 현란한 네온사인을 보며 냅킨에 적은 생각들이 19인치 TV모니터 190대로 이뤄진 ‘메가트론’의 시초였다”며 “수도 없는 작품들이 그렇게 탄생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는 백남준의 작품들이 파악돼 좀더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질 즈음에 이 자료들을 공개할 예정이다.

백남준과 이씨의 인연은 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TV 수상기를 지원하기로 한 삼성전자 측에서 당시 서울 세운상가에서 잘 나가던 TV기술자였던 이씨를 백남준에게 추천한 것. 그 후 이씨의 삶도 달라졌다. 1년에 8,9개월은 미국 독일 등 해외에서 지내며 백남준의 작업을 도왔다. 주위 친구들이 “도대체 뭐 하고 다니냐”고 물으면 “몰라도 돼. 아주 멋진 일 하고 있어”라고 넘겼다. 멀쩡한 TV를 이리저리 개조하는 일이 재미있어 선뜻 나섰던 그는 “예술은 잘 몰랐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영감으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진 어르신의 번뜩이는 상상력에 절로 감탄했다. 그게 일을 계속하게 된 이유라면 이유”라고 했다.

백남준의 상상력은 그의 손을 거쳐 비로소 현실이 됐다. 이씨는 “작품 ‘전자 초고속도로: 미국대륙’은 50개 주마다 그에 맞는 영상을 튼 것인데, 당시 기술로선 엄두를 내기 어려웠던 일이었다”고 했다. 그는 TV를 개조해 여러 이미지를 분해해 넣는 방법을 찾아냈다. 수백 번의 시행착오 끝에 원하는 영상이 나왔을 때의 감격을 아직도 생생하다.

이씨는 ‘다다익선’ 등 몇몇 백남준 작품의 사후관리를 맡고 있는데, 작품들 전체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점을 아쉬워했다. “작품에 쓰인 낡은 TV 수상기를 교체하고, 이동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작품 변형을 막기 위한 체계적인 보존 관리가 시급합니다.” 그래서 그는 몇 해 전부터 옛 TV 모델을 모으고 있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백남준 TV작품을 함께 만들어보며 비디오아트 세계를 맛볼 수 있는 강좌도 조만간 열 계획이다.

그는 요즘도 한 달에 두어 번 백남준 꿈을 꾼다고 한다.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작품을 옮겨 설치하고는 멀찌감치 서서 ‘선생님이 계시면 어디가 잘못됐다고 지적할까’하고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그때가 선생님이 가장 그리워져요.”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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