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동차 명가의 분열과 쟁탈전… 이단아가 승리했다
'꿈'(포르셰)과 '리얼리티'(폴크스바겐)가 결합한, 거대 왕국의 탄생이 글로벌 자동차시장에는 예고돼 있다. 이 지각변동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천부적인 자동차 엔지니어이면서, 포르셰의 대주주이자 폴크스바겐 감독이사회 회장인 페르디난드 피에히(73). 피에히 회장은 폴크스바겐의 첫 국민차 모델 '비틀'의 개발자이자 포르셰의 창업주 페르디난드 포르셰(1875~1951)가 구축한, 유럽 자동차산업 로열패밀리의 구심점이다.
포르셰 외손자가 폴크스바겐 CEO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피에히 회장은 포르셰 박사의 외손자이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안톤 피에히가 포르셰 박사의 법률 자문을 하다가 그의 딸 루이제와 결혼했다. 당연히 태어날 때부터 자동차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스스로도 어릴 때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가 처음 자동차 핸들을 잡은 건 아홉살 때. 운전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첫 주행을 시작하자마자 문을 들이받아 한달간 운전금지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1962년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를 졸업한 그는 독일 슈투트가르트로 향했다. 포르셰가(家)의 일원답게 외삼촌 페리 포르셰와 외사촌들이 이끄는 포르셰에서 경주용 자동차 엔진 개발을 맡는다. 포르셰 성을 쓰는 외사촌들이 디자인, 생산과 판매를, 피에히는 연구개발(R&D)로 역할을 분담한 것. 피에히는 포르셰 사상 최초로 르망레이스에서 우승한, 전설의 레이스카 917모델을 개발함으로써 엔지니어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70년 포르셰의 후계 구도와 관련, 포르셰 가문과 피에히 가문의 분열이 일어났다. 양 가문은 가족 모두 포르셰 경영에서 영원히 손을 떼고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기로 원칙을 세웠다. 피에히가 72년 폴크스바겐그룹 자회사인 아우디로 이직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정상으로 오르기 위한 승부사적 본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폴크스바겐 역시 그의 입장에선 포르셰만큼이나 인연이 깊은 곳. 외할아버지 포르셰 박사가 공장을 지었고, 아버지 안톤도 41~45년 사장을 지냈다. 그는 아우디에서 디젤터보직분사엔진TDI와 4륜구동 '콰트로' 개발에 성공했고, 88년 아우디 회장에 올랐다. 93년에는 경영난에 빠진 모기업 폴크스바겐그룹의 최고경영자(CEO)에까지 올랐다. 2002년 경영이사회 회장직에서는 물러났으나 여전히 감독이사회 회장으로서 실권은 놓지 않고 있다.
피에히는 경영이나 사생활에서나 참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람보르기니, 벤틀리, 부가티 등 프리미엄 차 브랜드를 인수, 폴크스바겐이 상류사회까지 어필할 수 있는 다양한 라인업을 갖춘 것은 그의 대표적인 성과. 그러나 이들 고급차 브랜드들이 폴크스바겐의 실적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또 자서전에서 "조화를 중시하는 사람은 아니다"고 자평했듯, 폴크스바겐의 정상을 지키기 위한 파워게임에서 많은 희생양도 만들어냈다.
화려한 여성 편력도 유명하다. 대학 재학 중 결혼한 첫 아내 코리나, 사촌동생 게르하르트 포르셰의 아내였던 말레네, 아이들 가정교사였고 지금의 아내인 우줄라 등 네 여성과의 사이에서 12명의 자녀를 뒀다.
피에히 家 vs 포르셰 家
피에히 회장이 지금까지 가장 많은 논쟁거리를 낳은 이슈는 단연 폴크스바겐과 포르셰의 인수전이었다. 2009년 폴크스바겐이 포르셰를 인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기 전까지, 뿌리가 하나이다보니 그 배경을 놓고 해석도 분분했던 것.
피에히 가와 포르셰 가는 스포츠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포르셰자동차와 유럽 최대의 자동차딜러인 포르셰홀딩스를 공동소유하고 있는데, 포르셰의 성공은 폴크스바겐의 협력이 바탕이 됐다. 폴크스바겐으로부터 부품을 공급받고, 폴크스바겐의 오스트리아 및 중부ㆍ동부유럽 독점 판매권을 가짐으로써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이 재산을 양 가문이 사이 좋게 절반씩 나눠 갖고 있었는데, 불화의 화근을 제공한 사람이 피에히 회장이었다. 포르셰에서 일할 때부터 비용에 상관없이 최고의 기술만을 고집, 외사촌들과 마찰을 빚었다. 특히 사촌 게르하르트의 아내 말레네와의 관계가 포르셰가를 격분시켰다. 72년 말레네가 이혼하면서 게르하르트의 지분 일부를 가져오자, 피에히가 지분 욕심을 냈다는 비난마저 쏟아졌다.
이런 가족사 탓에 포르셰가 2005년부터 폴크스바겐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하자, 피에히와 포르셰의 감독이사회 회장으로 있는 볼프강 포르셰 간의 사촌전쟁으로 비쳐졌다. 처음에는 포르셰가 폴크스바겐의 지분을 30% 이상 확보하며 승리를 굳히는 듯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빚더미에 오른 포르셰가 백기를 들었다. 폴크스바겐에 지분 49.9%를 넘기고, 10번째 브랜드로 편입됐다. 포르셰 박사의 유산을 물려받은 건 결국 피에히 회장인 셈이다.
남은 과제
73세의 고령에 20년 가까이 폴크스바겐을 장기 집권하고 있는 피에히 회장에게 남겨진 ?하나의 과제를 꼽자면 폴크스바겐과 포르셰의 합병을 마무리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당초 2011년 합병 예정이었지만, 포르셰가 폴크스바겐 지분 매입 과정과 관련해 송사에 휘말리고 막대한 세금 때문에 지연되고 있는 상황. 피에히 회장을 '2011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미 자동차전문잡지 오토모빌매거진은 "포르셰의 합병이 예상보다 어려운 작업이 되고 있지만 성공한다면, 외할아버지를 능가하는 자동차업계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범(汎) 포르셰 가의 이단아 같은 존재였던 그였지만, 또 다른 분열의 불씨는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피에히 회장은 최근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에 포르셰 지분(포르셰자동차 7%, 포르셰홀딩스 10%) 전부를 넘겼다. 자신의 사후, 가족들이 지분을 쪼개 매각하지 않도록, 그래서 가문의 역사가 담긴 브랜드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조치라는 분석이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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