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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나무가 숲으로 가는 길' 나무가 된 사나이와 떠나는 '숲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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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나무가 숲으로 가는 길' 나무가 된 사나이와 떠나는 '숲 오디세이'

입력
2011.01.2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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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디킨 지음ㆍ박중서 옮김

까치 발행ㆍ424쪽ㆍ1만5,000원

도시인들에게 식물의 물성(物性)은 대개 보드랍고 촉촉한 온실 화초의 이미지다. 해마다 얼고 녹고 썩고 새 흙이 퇴적되는 살아있는 땅에 강인하게 뿌리를 내린 나무와 풀의 실제 질감은, 먹고 입는 것과 손에 쥔 연장과 몸을 뉘일 공간의 재료를 그것으로부터 얻음에도 무척 낯설다. 영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저술가, 환경운동가인 로저 디킨(1943~2006)이 쓴 <나무가 숲으로 가는 길> 을 읽는 일은 그 질감을 느껴보는 일이 될 듯하다. 박물지와 에세이의 형식이 섞인 책인데 오래된 숲이 피워내는 습윤한 흙 냄새, 늙은 느릅나무 둥치의 꺼끌꺼끌한 감촉이 가득하다.

“개울을 건너던 도중에, 나는 여울에 놓인 나무다리 한쪽 난간에 기대선 채로, 깨끗한 빗물의 격렬한 흐름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나는 오솔길에 있는 복잡하게 뒤얽힌, 늙은 참나무 전정목들에서 다람쥐집을 세 개나 발견했다… 숲 전체가 삐걱거렸다. 흥미로운 점은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숲 안은 꽤 고요하다는 점이다. 숲은 그 자신을 보호한다… 내 곁에 있는 두 그루의 자작나무가 서로 몸을 비비면서 삐걱대는 경첩 같은 소리를 냈다.”(376쪽)

디킨은 서퍽 주에 있는 400년 묵은 자신의 집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그는 1960년대 후반 물푸레나무 개암나무 양딱총나무 검은딸기가 우거진 잡목 속에 이끼를 뒤집어 쓰고 있던 이 집을 산 까닭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나는 이런 폐허를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만물이 항상 진정으로 원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흙으로 되돌리는 일, 풍경 속으로 다시 녹아들어가는 일이다.” 책은 뿌리 변재(邊材) 유목(流木) 심재(心材)라는 부제목을 단 네 개의 장으로 이어지며 나무와 숲에 관한 정보, 그리고 인문적 사유를 펼쳐놓는다.

이 ‘나무 오디세이’는 디킨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출발해 주변의 습지와 공동체 농장을 둘러보다 피레네 산맥, 그리스 레스보스 섬, 톈산 산맥, 투르키스탄 등으로 이어진다. 다양한 숲과 숱한 사람을 거치며 그의 사색은 깊어져 간다. 가문비나무의 생리와 2차 대전의 핏빛 기억이 얽히고 침목꾼의 생업과 오스트레일리아 신화가 겹친다. 이 책이 지닌 인문 에세이로서의 가치는 호두나무 박판으로 계기판을 만드는 재규어 공장의 이야기에서 백미를 이룬다.

“조립 라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커다란 재규어 한 대를 바라보았다… 똑같은 이름의 진짜 야생동물이 물속에 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기계가 지나갔다는 흔적이나 탄소 연무의 흔적은 물론이고, 지구 위에 어떤 손상도 남기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이 모두를 빼버리고 나서야, 이 기계는 완벽함을 성취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은 호두나무를 심을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180쪽)

책의 맨 끝 부분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디킨의 마지막 목소리다. 디킨은 이 책을 탈고한 뒤 뇌종양 선고를 받고 넉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읽고 있는 책에 반사된 빛에 이끌려 온 곤충들을 살피는 디킨의 시선에선, 마침내 스스로 한 그루의 나무가 된 달관과 평온한 낙관이 느껴진다. 다만 병중에 마무리한 책이라 그런지 글을 흐름이 매끄럽지만은 않다. 옮긴이는 후기에 “대패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목재라기보다 도끼로 갓 베어내어 울퉁불퉁한 목재에 가깝다고나 할까. 생나뭇가지처럼 거칠지만 신선한 문장이 또다른 매력”이라고 썼다.

로저 디킨은 “인류는 강과 바다에 못지않게 나무에 의존해왔다. 나무와 우리의 관계는 물질적인 것인 동시에 문화적이고 정신적이기까지 하다”고 썼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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