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 2주기… 현장서 미사 286회 집전했던 이강서 신부"재개발은 가진 자 재산증식… 지금도 서울 전역에서 진행제2의 용산 가능성 도사려"
"참사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에 용산 4구역 철거민들의 달력은 여전히 2009년 1월20일 일 겁니다."(이강서 신부)
철거민과 경찰관 등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용산 참사'가 2주기를 맞았다. 용산 참사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있던 남일당 옥상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농성자 5명과 경찰관 1명이 숨진 사건이다.
2주기를 하루 앞둔 19일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이강서 베드로 신부를 만났다. 그는 참사 이후 남일당 앞 거리에서 매일 오후 7시에 열리던 '생명평화미사'를 집전했다. 2009년 5월1일~2010년 1월6일 총 286차례의 미사를 열면서 유족 등의 비통한 마음을 달래고, 조금은 불편한 사고 현장으로 시민들을 불러 모은 주인공이다. 많을 때는 이 미사에 2,000여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그는 2년 전 오늘을 분명하게 기억하면서도 "회상하기가 버겁다"고 입을 뗐다. "소식을 듣고 당일 오후에 현장을 찾았죠. 삼엄한 경찰들의 경비 속에서 초라한 분향소가 차려지고 있었어요."
이 신부는 유족과 철거민들의 참상을 목격한 뒤 교구를 설득해 미사를 시작했다. 앞서 현장을 지키던 문정현 신부는 그에게 주임신부 자리를 내줬다. 그는 "처음에는 유족, 철거민만이 참가하던 것이 후반부로 갈수록 어린아이, 어르신 등 일반 시민들로 채워졌다"면서 "제 것 챙기기에 바쁜 사회에서 사람들이 연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 같아 뿌듯했다"고 했다.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는 1986년 서울 상계동 재개발구역이 철거되자, 집을 잃은 사람들이 명동성당에 천막을 지으면서 시작됐다. 이 신부는 "용산 참사만 봐도 25년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재개발은 여전히 주민들의 더 나은 삶이 아니라 가진 자들의 재산 증식과 권익을 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1980, 90년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었지만, 쫓기고 내몰린 지금은 '고립된' 가난이라는 점 때문에 더 가혹해요. 2011년 도시 빈민은 기원, 만화방, 찜질방,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 살면서 노숙자와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기까지 하죠."
현재 남일당 등 용산 4구역의 기존 건물 230여동은 지난해 철거를 마치고 터만 남았다. 하지만 그가 집전하던 생명평화미사는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마다 열리고 있다. 유가족을 비롯해 평균 50여명이 꾸준히 참석하는 자리다.
그는 "용산 참사는 남의 몫을 빼앗아 더 풍요로워지고자 했던 시대의식이 전면에 드러난 사건이었다"고 평가하며 "서울 전역에서 재개발이 한창 이뤄지고 있는 만큼 같은 일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의 끝말은 세상을 향한, 아니 우리를 향한 질문이었다. "약자는 구휼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 사람들입니다. 이번 정권이 말하는 공정사회, 약자가 부당한 처분을 받지 않는 것이 공정 아닌가요?"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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