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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20> 교사로 처음 부임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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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20> 교사로 처음 부임한 날

입력
2011.01.18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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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敎職), 그것은 그야말로 나의 천직(天職)이다. 하늘이 내린 직종이고, 타고 난 직종일지도 모른다. 모르긴 해도 교직 아닌 어떤 다른 직종에도 나는 스스로 적응하지 못했을 것 같다. 남들이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는 어떤 다른 직종도 내게는 남의 일이었다. 부러워하거나 넘겨다보거나 하는 일은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물론 교직에 시달리기도 했다. 고통도 겪었다. 심지어 이따금 회의(懷疑)에 빠져들기도 했다. 방황도 하고 준순(浚巡)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종 내가 골라잡은 그 직종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에 잘 적응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왜 이 모양일까? 스스로 즐겨 택한 일인데 어쩌자고 이 꼴일까?'

그런 생각에 더러 사로잡히기도 했다.

'모처럼 주어진 직종에 내가 왜 이 모양이지?'하는 생각이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헤매고 채찍질 하곤 했다. 그러나 필경은 스스로 다그쳐서 제 길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러자니 자책감에 시달리면서 괴로워하기도 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바로 그 해, 스무 세 살의 나이로 중고등학교 교사를 시작했다. 아니 요행으로 시작할 수가 있었다. 내가 어렸을 무렵, 아주 드물게 일곱 살의 나이로 초등학교에 입학했었기 때문에 남보다 한두 해 적은 나이로 대학을 마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에서 삼 년 동안 근무했다. 그리곤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면서 대학으로 옮겼다. 이후 장장 47년을 근무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걸쳐서 자그마치 꼬박 50년을 교직에 몸 바친 것이다. 대학 전임을 최종적으로 마쳤을 때, 내 나이는 73세였다. 정부에서 정해 놓은 정년 기한을 8년이나 넘기도록 같은 직종에 전임으로 종사했다.

10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반세기의 50년이라니. 강산이 다섯 번 변하는, 길고 긴, 까마득한 세월이다. 중고등학교는 한군데였지만 대학은 몇 곳을 옮겨 다녔다. 대전의 충남대학을 위시해 서강대학교 그리고는 김해의 인제대학 또 대구의 계명대학 해서 네 군데의 대학에서 전임 교수 노릇을 맡아 했다. 서강대학교에는 자그마치 29년 봉직했다. 그 뒤 두 군데의 대학을 옮기고 다녔는데도 서강대학교에서는 나를 명예교수로 복직시켜 주는 은전을 베풀었다.

한데 50년에 걸친 교직 생활의 시작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중고등학교에서 치러졌다. 대학을 갓 졸업하기도 전에 중앙학원에서 내가 다니던 대학의 주임교수에게 청탁을 했다. 졸업생 하나를 골라서 교원으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의 명문 사립교인 중앙중고등학교로 부임하게 되었다. 한데 부임하기 전에 교장에게서 봄의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학교로 와서 교장실에 들르라는 전갈이 왔다.

교장은 그 자리에서 다음과 말했다.

"김 선생, 첫 날 부임하는 날 택시를 타고 오시오. 수위가 정문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택시 요금을 물 것이요. 첫 출근은 꼭 택시로 하세요."

당시로는 서울 시내에 전차나 버스 말고는 마차가 손님을 태우고는 거리를 누비며 다니고 있었다. 그게 조금은 고급의 대중교통 기관이었다. 택시는 아주 귀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제가 왜 첫 출근에 택시를 타고 와야 합니까? "

워낙 인덕이 높고 점잖은 교장은 천천히 타이르듯 대답을 했다.

"선생은 모심을 받는 귀한 직종입니다. 첫 출근에 버스나 마차 같은 것을 타고는 오시게 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모심을 받는 분답게 택시를 타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의 첫 출근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의 첫 출근은 이사장이 보낸 자가용 승용차로 했다는 것이다.

당시 중앙고등학교 이사장은 나중에 부통령을 지내기도 한 김성수씨였는데, 바로 그 분이 자신의 자가용을 초임 교사의 집에까지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 사연을 들려 준 다음 교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한데 나는 초임 선생을 모시고 싶어도 자가용이 없습니다. 그래서는 마지못해, 첫 부임하시는 김 선생더러 택시나마 타고 오리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가슴이 찡해 왔다.

'아, 교직아란 그런 것이던가?'하고 스스로 긍지에 넘쳤다. 감격스럽기도 했다.

날짜도 기억하고 있다. 3월2일 첫 출근하는 나는 택시를 탔다. 성북동 하숙집에서 계동 골목 꼭대기의 학교까지 그 먼 길을 택시를 타고 갔다. 학교 정문 앞에 택시가 섰다. 기다리고 있던 수위 아저씨가 즉각 택시 요금을 물었다. 초임 교사는 발걸음도 당당히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 발걸음은 그 뒤 줄곧 50 년 동안 내내 교직에 대한 드높은 긍지로 이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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